19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도의 지위도 원점으로 돌아왔다. 카이로 선언(1943)은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의 축출을 천명했고 포츠담 선언(1945)이 이를 재확인했다 — 1905년의 편입이 러일전쟁의 군사 논리 속에서, 외교권을 잃어가던 대한제국을 상대로 이뤄졌음을 앞 편들에서 보았으니, 한국 측이 독도를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지역"의 첫머리에 놓는 이유는 자명하다. 연합국의 실무 조치가 뒤따랐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군최고사령부(GHQ/SCAP)는 지령 SCAPIN 제677호로 일본의 통치·행정 범위를 획정하면서, 일본에서 제외되는 지역에 울릉도·리앙쿠르암(다케시마)·제주도를 명시했다 — 독도가 이름을 특정해 일본의 바깥에 놓인 것이다. 첨부 지도 역시 독도를 한국 쪽 구역에 그렸다. 이어 6월의 SCAPIN 제1033호는 일본 어선의 조업 한계선 — 이른바 맥아더 라인 — 을 그으며 "일본 선박과 선원은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통치권에서도, 조업권에서도 독도는 일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됐고, 미군정기의 남조선을 거쳐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관할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본 측 반론을 정확히 소개하자. 두 지령에는 공통적으로 유보 조항이 있다 — "이 지령의 어떤 조항도 영토 귀속에 관한 연합국의 최종 결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SCAPIN은 점령 행정의 편의적 구획일 뿐이며 영토의 최종 처분은 강화조약(1951)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한국 측 재반박 — 유보 조항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는 뜻이지 "이 구획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패전 직후, 이해관계의 로비가 본격화되기 전 연합국 실무진의 1차적 인식이 독도를 한국 쪽에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 강화조약은 독도에 대해 침묵했으므로(dk_10에서 상세히), SCAPIN이 만든 현상(독도의 일본 제외)을 명시적으로 뒤집은 문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 측 논리의 골격이다. 점령기 내내, 그리고 조약 발효 시점까지 독도를 실제로 관할한 것은 한국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최근까지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 미군정과 극동군사령부의 내부 문서들 속에서 독도가 어떻게 다뤄졌는지가 연구자들의 문서고 작업으로 하나씩 드러나는 중이며, 그 가장 극적인 사례가 2026년에 보도된 NARA 기밀문서다(dk_11). 그러나 그 문서를 보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이야기가 있다. 같은 시기 이 섬의 바다에서 실제로 벌어진 비극 — 1948년의 독도폭격사건이다.
SCAPIN 677 (1946) — 패전국 일본의 경계선에서 제외된 섬
출처
- [기록보존소] SCAPIN 제677호·제1033호 원문 및 첨부 지도
- [기록보존소] 카이로 선언(1943)·포츠담 선언(1945)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