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독도 — 파리의 당빌, 에도의 하야시, 그리고 리앙쿠르호

1849 · 파리·에도·독도 해상

섬의 역사는 문서만이 아니라 지도로도 쌓인다. 이번 편은 세 장의 지도와 한 척의 배 이야기다. 첫 장은 파리에서 그려졌다. 1737년 프랑스 왕실 지리학자 당빌(J. B. B. d'Anville)이 「신중국지도첩」에 수록한 조선왕국전도(Royaume de Corée) — 청 강희제 대의 예수회 측량 자료에 기반한 이 지도는 당대 유럽에서 동아시아 지도의 표준으로 통했다. 여기에 울릉도와 우산도에 해당하는 두 섬(Fan-ling-tao, Tchian-chan-tao — 반릉도·천산도, 각각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의 한자를 중국식으로 읽어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표기다)이 조선 본토와 같은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유럽인이 독도를 실측하기 한 세기 전, 문헌의 세계에서 이 섬들은 이미 조선의 판도로 유럽에 전해지고 있었다 — 조선의 지리지(우산도 전통)가 중국을 거쳐 파리까지 흘러간 경로 그 자체가, 앞 편들에서 본 기록의 층이 국제적으로 유통됐다는 방증이다. 둘째 장은 에도에서 그려졌다. 1785년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 — 「삼국통람도설」의 부속 지도로, 나라마다 색을 달리 칠한 채색 지도다. 조선은 황색, 일본은 녹색. 그리고 울릉도와 그 곁의 작은 섬이 조선의 황색으로 칠해져 있고, 곁에는 "朝鮮ノ持也(조선의 것이다)"라는 주기까지 적혀 있다. 일본인이 만들어 일본에서 간행된 지도가 스스로 증언하는 셈이다. 이 지도는 후일담까지 있다 — 19세기 오가사와라 제도의 귀속을 놓고 미국·영국과 교섭할 때, 일본 정부 자신이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 번역판)를 영유의 근거 자료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자국에 유리할 때는 근거로 쓴 지도가, 독도 대목에서는 "민간 지도일 뿐"이 된다는 지적이 따라붙는 이유다. 관찬 지도로 범위를 넓혀도 흐름은 같다 — 메이지 초기 일본 육군 참모국·해군 수로부가 만든 지도와 수로지들은 울릉도·독도를 조선 동해안 항목에 배치하거나 일본 판도 바깥에 두는 사례를 반복해서 남겼다. 셋째 장은 바다 위에서 그려졌다. 1849년 1월 27일,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독도를 목격하고 배 이름을 따 리앙쿠르 암(Rochers Liancourt)이라 명명했다 — 서양 해도에 독도가 실측 좌표로 오른 출발점이다. 이후 1854년 러시아 푸탸틴 함대(팔라다호 항해)가 올리부차·메넬라이로, 1855년 영국 호넷함이 호넷 록스로 각각 재명명하면서, 19세기 서양 해도에서 독도는 세 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앞서 1787년 라페루즈 탐험대는 울릉도를 실측해 다즐레(Dagelet)섬으로 명명한 바 있다 — 이때 승조원 부탱의 이름을 딴 부솔 암초 등 주변 지형에도 프랑스식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미국 지명위원회 등이 쓰는 "리앙쿠르 록스"라는 제3의 표기가 여기서 왔다 — 한국 입장에서는 중립을 가장한 표기라는 불만이, 일본 입장에서는 다케시마가 아니라는 불만이 각각 있는, 19세기 포경선이 남긴 기묘한 유산이다. 지도는 그 자체로 영유권을 결정하지 않는다 — 국제법은 지도를 보조 증거로 취급한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이 이 섬을 누구의 것으로 인식했는가"라는 질문에, 파리와 에도의 지도들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을 일본 정부 문서로 못 박는 사건이 1877년에 온다.

출처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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