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기록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은 장군도 관리도 아닌 어부다. 동래 출신 안용복 —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어를 익힌 이 뱃사람이, 조선과 일본 사이 최초의 울릉도 영유권 교섭을 촉발했다. 1693년,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오야 가문 어부들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17세기 들어 일본 요나고의 오야·무라카와 두 가문이 막부의 도해 허가를 받아 울릉도(당시 일본 호칭 죽도)에서 벌목과 어로를 해오던 터였다 — 조선의 쇄환 정책으로 섬이 비어 있던 시기의 일이며, 일본이 "17세기 고유영토 확립"을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 도해 활동이다. 안용복 피랍은 이 어로권 충돌을 국가 간 외교 문제로 끌어올렸다. 조선 조정과 에도 막부(쓰시마번 경유) 사이에 수년간 오간 이 교섭이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 일본식으로는 죽도일건(竹島一件)이다. 결정적 장면은 막부 내부에서 나온다. 1695년 12월, 막부는 돗토리번에 질의했다 — "죽도(울릉도)는 언제부터 이나바·호키(돗토리번) 소속이 되었는가?" 돗토리번의 회답: "죽도는 이나바·호키 소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어진 문답에서 번은 이렇게 덧붙인다 — "죽도는 물론 송도(松島, 당시 일본의 독도 호칭)를 비롯해 두 나라(이나바·호키)에 부속된 섬은 없습니다." 울릉도만 물었는데 독도까지 아울러 "우리 소속이 아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 회답을 받은 막부는 1696년 1월 일본인의 죽도 도해를 금지했다 — 도해금지령이다. 17세기 일본 중앙정부가 울릉도 권역을 조선의 것으로 정리한 공식 조치이며, "17세기에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일본 정부의 현재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다름 아닌 17세기 일본 자신의 문서인 셈이다. 일본 측은 금지령이 울릉도만을 대상으로 했고 독도 도해는 금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금지령의 전제가 된 돗토리번 회답서가 송도까지 명시해 부정했다는 점, 그리고 독도 도해는 애초 울릉도행의 중간 기착일 뿐 독자적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점이 반박으로 제시된다. 같은 해 안용복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간다(1696년 5월). 이번엔 피랍이 아니라 자발적 도해였다 — 조선 측 기록(숙종실록, 그의 공초)에 따르면 그는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監稅將)"을 자칭하며 돗토리번에 일본 어민의 침범을 항의했고, "송도는 곧 우산도이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라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 공초 기록은 우산도=송도=조선령이라는 인식이 17세기 말 조선 민간에까지 통용됐음을 보여주는 사료다(안용복 진술의 세부 과장 여부는 학계에서도 논의되나, 도해금지령이라는 결과 문서는 일본 측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귀국한 안용복을 기다린 것은 포상이 아니라 국문이었다 — 관직 사칭과 무단 월경의 죄. 사형론까지 나왔으나 감형되어 유배로 마무리됐다. 훗날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탄식했다 —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며, 조정이 그를 죽이려 한 것은 적을 이롭게 할 뻔한 일이었다고. 울릉도쟁계의 유산은 제도로 남았다. 조선은 이후 2~3년 간격의 수토(搜討)제도를 정례화해 관리를 정기 파견했고 — "비워서 관리"하는 행정이 19세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사건의 문서들은 180년 뒤, 메이지 정부가 같은 질문에 다시 답해야 했을 때 그대로 소환된다. 다음다음 편, 태정관지령이다.
안용복 (1693·1696) — 어부의 담판과 막부의 도해금지령
출처
- [기록보존소] 숙종실록 — 안용복 공초 관련 기사
- [기록보존소] 돗토리번 회답서(1695)·에도막부 죽도도해금지령(1696)
- [단행본] 이익, 성호사설 — 울릉도조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