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출발점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512)조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이어지는 서술이 유명한 나무 사자 이야기다 — 하슬라주(지금의 강릉 일대) 군주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고 거칠어 힘으로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나무로 사자를 깎아 전선에 나눠 싣고 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우산국은 항복했다. 열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고, 삼국유사 역시 지증왕 대의 우산국 복속을 전한다. 출항지로는 강릉설과 삼척설이 있으며, 삼척시는 이사부 출항을 기념하는 사업들을 이어오고 있다. 자, 여기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정직한 구분"을 하자. 이 기록이 확정해주는 사실은 — 6세기 초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세력(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어 한반도 국가의 판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직접 말해주지 않는 것은 — 우산국의 강역에 독도가 포함되었는가이다. 삼국사기는 독도를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측은 무엇을 근거로 우산국과 독도를 연결하는가. 논리는 지리와 생활권이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87.4km — 맑은 날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유일한 섬이다(이 가시성은 뒤에 볼 세종실록지리지 문장의 핵심이기도 하다). 반면 일본 오키섬에서 독도까지는 157.5km로, 오키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는다. 나침반 없는 시대의 바닷사람들에게 "보이는 섬"과 "보이지 않는 섬"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 울릉도 사람들의 어로 생활권에 독도가 자연스럽게 포함되었으리라는 추론이며, 후대의 조선 문헌들이 우산도(독도)를 울릉도와 한 쌍으로 묶어 기록하는 전통이 그 방증으로 제시된다. 일본 측은 물론 이 연결을 "추정일 뿐"이라 반박한다. 공정하게 말해, 512년의 기록 하나만으로 독도 영유를 확정할 수는 없다 — 어느 나라의 고대사도 그런 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기록의 진짜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첫째, 울릉도 권역이 1500년 전에 한반도 국가의 역사에 편입되었다는 시간의 깊이 그 자체 — 일본 측 기록에서 이 권역이 처음 의미 있게 등장하는 17세기보다 1100년이 이르다. 둘째, 이후 펼쳐질 모든 기록의 무대가 여기서 마련된다는 것이다. 조선의 지리지도, 안용복의 담판도, 대한제국의 칙령도 모두 "울릉도와 그에 딸린 섬"이라는 이 구도 위에서 전개된다. 기록의 층은 이렇게 쌓이기 시작했다.
이사부와 우산국 (512) — 나무 사자와 함께 시작된 기록
출처
- [기록보존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열전 이사부전
- [기록보존소] 삼국유사 기이편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