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기파랑가·안민가 — 잣나무처럼 높은 사람

765 · 경주 남산 삼화령 / 귀정문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경덕왕이 3월 삼짇날 귀정문 누각에 올라 좌우에게 말했다. "누가 길에서 위엄과 풍모를 갖춘 승려 하나를 데려올 수 있겠는가?" 마침 크고 깨끗한 차림의 승려가 지나가 데려왔으나 왕은 "내가 말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물렸다.

다시 한 승려가 누비옷을 입고 벚나무통을 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이 기뻐하며 맞아 통 안을 보니 차 달이는 도구가 들어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올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왕이 차를 청해 마시니 맛이 특이하고 그릇에서 기이한 향이 났다. 왕이 말했다. "짐이 듣기로 대사가 지은 「찬기파랑가」의 뜻이 매우 높다(其意甚高) 하니 과연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달라." 충담사는 곧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咽鳴爾處米 — 흐느끼며 바라보매 露曉邪隱月羅理 — 이슬 밝힌 달이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沙是八陵隱汀理也中 — 모래 가른 물가에 耆郎矣貌史是史藪邪 — 기파랑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逸烏川理叱磧惡希 — 일오내 자갈 벌에서 郎也持以支如賜烏隱 — 낭이 지니시던 心未際叱肹逐內良齊 — 마음의 갓을 좇고 있노라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 아으,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 향찰 해독은 학자마다 차이가 크다. 위 풀이는 양주동 계열의 통용 해독을 따른 것이며, 김완진 등의 해독은 여러 구절에서 상당히 다르다.

【자연물로 지은 초상】 이 작품이 각별한 것은 사람을 그리는 방식 때문이다. 기파랑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 노래는 한 번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물만 늘어놓는다.

달, 흰 구름, 물가, 모래, 자갈, 잣나무, 눈, 고깔. 이 사물들이 대립적 상징 구조로 짜인다. 달은 높이 떠 세상을 비추는 존재이자 화자가 우러르는 대상이고, 흰 구름은 그 곁을 스치는 무상이다. 물가의 자갈은 낮고 흩어진 것이며, 잣나무는 곧고 높이 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줄 — 눈조차 덮지 못할 만큼 높은 잣나무 가지.

눈이 덮는다는 것은 시련과 오염이다.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높이에 기파랑의 절개가 있다. 인물의 성품을 형용사 하나 없이 사물의 높이로만 말한 것이다. 경덕왕이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한 평가는 이 대목을 가리킨 것으로 읽힌다.

【기파랑은 누구인가】 정작 기파랑(耆婆郞)이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랑이었다는 것 외에 기록이 없다.

이름을 두고는 인도 의왕(醫王) 기바(Jīvaka)에서 왔다는 견해, 순우리말 이름의 음차라는 견해가 있다. 정체에 대해서는 실존한 화랑으로 보는 견해, 특정 인물이 아니라 화랑도의 이상을 인격화한 존재로 보는 견해, 나아가 경덕왕대 정치 상황에서 실각한 인물을 애도한 것이라는 정치적 독법까지 제기된다.

확실한 것은 이 노래가 찬가(讚歌)라는 점이다. 향가 가운데 대상을 찬양하는 성격이 가장 뚜렷한 작품으로, 「칭찬여래가」와 함께 찬가의 대표 예로 꼽힌다. 다만 화자가 "흐느끼며" 시작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추모의 성격을 띤다.

【짝을 이루는 노래 — 안민가】 충담사가 왕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서 지은 「안민가」는 「찬기파랑가」와 성격이 정반대다.

"임금은 아버지요 /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 백성이 사랑을 알리라 (…)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 나라가 태평을 지속하느니라."

국가를 가족에 빗대고, 각자가 제 자리를 지킬 때 나라가 편안하다고 말한다. 유교의 정명(正名) 사상이 뚜렷하다. 향가 25수 중 유교적 색채가 가장 짙은 작품이며, 「우적가」·「보현십원가」와 함께 교훈시가로 분류된다.

같은 작가가 하루에 두 편을 남겼는데 하나는 서정적 찬가이고 하나는 정치적 교훈가라는 사실은, 향가라는 갈래의 폭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왕이 승려에게 차를 얻어 마시고 노래를 청하는 이 장면 자체가, 향가가 궁정과 저잣거리 양쪽에 걸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때 신라는】 경덕왕이 「안민가」를 청한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경덕왕대는 문화의 절정기인 동시에 왕권과 진골 귀족의 갈등이 심화되던 때다. 왕은 관제와 지명을 대대적으로 중국식으로 바꾸며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사후 이 개혁은 상당 부분 되돌려진다.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청한 왕의 요청에는 그 시기의 불안이 배어 있다.

충담사가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올리고 오는 길이었다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주 남산은 신라인들이 바위마다 불상을 새긴 산이다. 승려가 산의 미륵에게 차를 바치고 내려와 왕에게 정치의 도리를 노래로 일러주는 장면 — 신라의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압축한 풍경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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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향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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