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형시다. 이 형식이 500년을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 틀이 깨진다.
사설시조(辭說時調)는 초장과 중장이 길게 늘어난 시조다. 원래 이 용어들은 시조창의 창법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형식적 차이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한 행이 6음보 이상으로 늘어나면 엇시조, 두 행 모두 늘어나면 사설시조로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종장이다. 앞이 아무리 길어져도 종장의 3·5조 규칙만은 지킨다. 형식을 깨되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지는가】 길이가 달라지면 내용도 달라진다.
평시조가 한 장면이나 한 정서를 압축한다면, 사설시조는 수다를 떤다. 사물을 늘어놓고, 상황을 묘사하고, 대화를 옮기고, 흉을 본다. 평시조가 그림이라면 사설시조는 만화에 가깝다.
다루는 내용도 넓어진다. 자연과 충효 대신 사랑과 이별과 일상과 풍자가 들어온다. 특히 성(性)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 시집살이의 고통, 무능한 지배층에 대한 조롱이 나타난다. 사대부 시조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댁들에 동난지이 사오」다. 게젓 장수와 손님의 대화를 옮긴 사설시조인데, 장수가 게를 두고 온갖 한자어를 늘어놓으며 유식한 척하자 손님이 "그냥 게젓이라 하려무나" 하고 면박을 준다. 겉멋 든 지식인에 대한 풍자다.
「나모도 바히돌도 업슨 뫼헤」는 다른 결이다. 매에게 쫓기는 까투리와 바다 한가운데서 도적 만난 뱃사공의 심정을 길게 늘어놓은 뒤, 종장에서 "엊그제 임 여읜 내 안이야 엇다가 가흘하리오"로 닫는다. 극한의 공포를 두 개나 쌓아올린 뒤 그보다 더한 것이 이별이라고 말하는 구조다.
【누가 지었나】 사설시조에는 평민이 대거 참여했다. 이것이 평시조와의 결정적 차이다.
조선 후기에는 시조를 전문으로 짓고 부르는 가객(歌客)이 등장해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같은 가단을 형성했다. 김천택과 김수장이 그 중심이었다. 이들은 대개 중인 신분이었다.
다만 사설시조 대부분은 작자 미상이다. 지은이가 기록될 만한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구영언』에는 만횡청류(蔓橫淸類)라는 항목으로 이런 작품들이 실렸는데, 김천택 자신도 이것들이 "음란하고 촌스럽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었다.
【청구영언이라는 사건】 1728년(영조 4)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집이다. 시조 580수를 수록했다.
구성은 정윤경의 서문, 본편 13항, 김천택 자신의 자서, 마악노초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본편은 곡목별로 나뉘고, 두 번째 항에 고려말 작품 6수를 싣는 등 시대순 배열도 고려했다.
정윤경은 서문에서 김천택을 두고 성률에 뛰어날 뿐 아니라 문예에도 밝다고 평했다. 실제로 그는 일반 가객보다 지적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작 자신의 시조 작품에는 사설시조가 하나도 없고 모두 평시조이며, 내용도 강호산수와 교훈이 많아 사대부 시조의 경향을 답습한다. 남의 노래는 파격까지 모으면서 자기 노래는 정통을 지킨 셈이다.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수집을 넘어선다. 구전되던 노래에 문자와 체계를 부여함으로써 시조를 하나의 문학 갈래로 확립했다. 이후 백 수십 종의 가집이 나왔지만 대개 김천택이 잡은 틀을 따랐다.
【그때 조선은】 영조 즉위 직후인 1728년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무장 반란으로 터진 사건이다.
그 격동의 해에 한 중인 가객이 노래책을 엮고 있었다. 정치사와 문학사가 늘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배경에는 도시의 성장이 있다.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한양의 인구가 늘면서, 소수의 가객과 문인이 즐기던 노래가 여항의 대중에게 퍼졌다. 18세기 초 사람들은 시조를 신번(新翻), 가곡을 신곡(新曲)이라 불렀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이다. 『청구영언』은 그 새 문화의 결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