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7월 7일, 중일전쟁 1주년에 맞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됐다(발기인총회는 6월 22일 부민관).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59개 단체와 개인 56명이 발기했고, 발회식에는 총독과 군사령관이 참석했다. 실천강령은 황국정신 현양, 내선일체 완성, 전시 경제정책 협력, 근로보국 — 그리고 이 연맹은 도(道)에서 부·군을 거쳐 말단의 애국반까지 내려가는 피라미드로 식민지 전체를 묶었다. 지원병과 창씨개명을 독려하고, 공출과 헌금과 폐품 수집을 챙기고, 일본어를 가르쳤다. 골목의 애국반 반장이 이웃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체제 — 친일이 "가입"이 아니라 "일상"이 된 순간이다.
1940년 10월, 이 조직은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 개편된다. 일본 본토에서 정당을 모두 해산하고 대정익찬회 체제를 만든 것에 대응한 조치였는데, 조선은 "대정익찬회 조선지부"가 아니라 별도의 총력연맹이 됐다 — 정치적 권리는 없고 협력만 요구되는 식민지의 처지가 조직 형태에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조선총독이 직접 총재를 맡아 행정기구와 한 몸이 됐고, 기관지 《국민총력》을 내며 공출·징병·징용을 독려했다. 태평양전쟁기 최대 규모의 전시단체였고, 1945년 7월 10일 — 해방을 한 달 앞두고 — 해산됐다.
관제 피라미드의 바깥에는 민간의 화답이 있었다.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이다. 임전대책협의회 등 민간 전쟁협력 조직들을 통합한 이 단체는 출범식에서 "2천4백만 반도민이 일치결속하여 성전완수로 황국의 흥융을 기할 것"을 선서했다. 이듬해 징병제 홍보 연설회의 연단에는 이광수가 섰다. 이 단체의 발기인·평의원 명단은 훗날 친일반민족행위 조사의 핵심 근거 자료가 된다.
총동원 체제에서 협력과 생존의 경계는 흐려진다. 애국반 배급을 받으려면 체제 안에 있어야 했고, 이름을 걸고 단상에 오른 사람과 마지못해 반상회에 앉은 사람이 같은 피라미드 안에 있었다. 해방 뒤 우리는 그 경계를 어디에 그었고 — 그 선은 충분히 정확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