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와 시천교 — 아버지의 일진회, 아들의 대동일진회

1906 · 경성

동학은 반외세 민중 종교로 출발했다. 그런데 그 조직망의 일부가 병탄 협력의 하부구조가 됐다 — 이 역설의 중심에 이용구가 있다. 동학 지도자였던 그는 1904년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진보회를 만들어 일진회에 합류시켰고,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재편하며 친일 노선의 이용구 등을 출교시키자 1906년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세웠다. 일진회의 종교적 그릇이었다. 1910년 병합과 함께 일진회가 해산된 뒤에도 시천교는 남아, 그 인맥을 품은 채 식민지 시대를 통과한다.

그리고 1938년 11월, 이 그릇이 다시 정치단체가 된다.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비상시국에 종교단체는 불필요하다"며 시천교를 통째로 정치단체로 개편해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를 만든 것이다. 이석규·송계원이 창설을 주도했고, 회장은 윤갑병 — 1904년 일진회 평의원 출신이다. 대동일진회는 시국강연회를 열고, 이용구·송병준 추도회를 개최했으며, 1939년에는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와 함께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까지 지냈다. 병합에 협력한 아버지 세대를, 아들 세대가 전시체제 아래서 공로자로 추모한 것이다.

이 단체는 오랫동안 목록에서 이름이 잘못 돌아다녔다. "대정회"라는 명칭으로 소개되곤 했지만, 그런 단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확인해 주는 정확한 이름은 대동일진회다. 이 시리즈를 만들며 바로잡은 지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시천교 내부에서도 이석규·윤갑병의 정치단체화에 반발한 조태원 등이 교단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겠다며 별도로 갈라져 나가 법정 다툼까지 벌였다 — 같은 교단 안에서도 길은 갈렸다.

1904년의 일진회와 1938년의 대동일진회 사이에는 34년이 있다. 그 사이를 이은 것은 이념도 강령도 아닌, 교단이라는 조직과 부자(父子)라는 핏줄과 윤갑병이라는 인맥이었다. 협력이 한 세대를 건너 세습될 때, 끊어야 할 것은 사람인가, 아니면 그것을 실어 나른 구조인가?

출처

이 글은 협력의 계보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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