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병합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조선인의 집회와 결사를 봉쇄했다. 그 시기에 허용된 거의 유일한 조직 형태가 "친목회"였다. 1916년 11월 경성에서 만들어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는 이름만 들으면 유지들의 사교 모임이다. 그러나 초기 조직망에는 병합 과정에 깊이 개입한 조중응, 금융·기업계의 조진태·한상룡,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의사 안상호 등 각 분야의 상층부가 모여 있었다. 3·1운동을 지난 1921년에는 고위 관료 출신 민영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완용·민영휘·이윤용을 고문으로 앉히며 약 250명 규모로 세를 불렸다.
이 단체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명단보다 "연구 과제"다. 일본의 국가 경축일, 경성의 번영, 근검저축, 식산흥업, 법령 숙지, 납세 의무, 위생과 질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조선 민중이 무단통치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한 방안으로 평가한다. 풀어 말하면, 총칼로 눌러놓은 사회를 스스로 굴러가게 만드는 방법의 연구다. 이들이 앞세운 논리는 "내선융화(內鮮融和)"였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등한 교류가 아니라, 식민지배를 전제로 조선인을 통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논리였다. 장신의 연구(2007)에 따르면 대정친목회는 1916년 창립부터 1940년 무렵까지 존속하며 총독부 시책에 협조했고, 이후 참정권청원운동에 나서고 만주 침략을 옹호했으며 창씨개명을 환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일진회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일진회는 요구하는 단체였다 — 조약을 지지하고 양위를 강요하고 병합을 청원했다. 대정친목회는 요구하지 않는다. 연구하고, 교류하고, 순응의 조건을 만든다. 병탄 협력이 통치 협력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협력의 주체는 폭도도 낭인도 아닌, 식민지 사회의 가장 배운 사람들이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 사실에서 "일제 때 유학하거나 관직에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는 결론으로 건너뛰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낙인이 된다. 개인의 평가는 시기와 직위와 행위에 따라 갈리고, 그래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은 행위 기준으로 판단했다. 구조를 보는 것과 개인을 싸잡는 것 사이 — 그 선을 어디에 그어야 역사는 정확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