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회에서 일진회로 — 병합을 청원한 사람들

1904 8월 20일 · 경성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이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했다. 그는 독립협회에 가담했던 윤시병·유학주 등과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고, 이틀 뒤인 8월 20일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꿔 윤시병을 회장으로 발족시켰다. 같은 해 동학의 친일 세력인 이용구가 동학 조직망을 기반으로 만든 진보회(進步會)를 12월에 흡수하면서, 서울의 정치단체가 전국 조직이 됐다. 이용구는 13도 지방총회장, 송병준은 평의원장에 앉았다.

일진회가 내건 강령은 네 가지였다 — "왕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시정의 개선, 군정·재정의 정리." 문장만 보면 개혁 단체다. 풀어 말하면 이렇다: 왕실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고, 행정을 고치고, 군대와 나라 살림을 정리하자. 그러나 이 개혁의 언어가 실제로 가리킨 방향은 일본이었다. 일진회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과 첩보에 협력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으며, 1907년에는 고종의 양위를 강요했고, 의병 탄압에 나섰다. 그리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뒤에는 순종에게 합방을 청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결말은 이 단체의 성격을 요약한다. 1910년 병합이 이뤄지자 일진회는 일제에 의해 해산됐다. 병합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병합과 동시에 용도 폐기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진회를 "망국을 초래한 매국 단체"로 평가한다. 그러나 단체의 해산이 인맥의 소멸은 아니었다 — 일진회 출신 민원식·김명준·윤갑병은 10년 뒤 국민협회로, 이용구의 시천교 인맥은 28년 뒤 대동일진회로 다시 나타난다.

"시정 개선"과 "인민 보호"라는 말로 병합의 길을 닦은 단체 — 개혁의 언어와 실제 행동이 정반대를 가리킬 때,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출처

이 글은 협력의 계보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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