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1964년 3월 한일회담 조기 타결("3월 타결, 5월 조인")을 추진하자, 야당과 사회단체 대표 200여 명이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구국선언을 채택했다. 청구권 3억 달러와 평화선 철폐가 "국토를 팔아먹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3월 24일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이후 석 달간 이어질 거대한 반대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관련 인물
세계는 같은 시기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 (1951~1952)
1951년 9월 8일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군정이 끝나고 주권이 회복됐다. 같은 날 미일안보조약도 체결돼 일본 내 미군 주둔의 법적 기반이 마련됐고, 조약은 1952년 4월 발효됐다.
소련은 이 회담에 참가했지만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한국도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정식 서명국 지위를 얻지 못해 대일 청구권을 직접 행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 이는 1965년 한일협정 청구권 문제의 근본 배경이 된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3항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일협정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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