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 사도세자의 죽음
영조와 세자 이선(사도세자)의 관계는 세자의 정신적 불안정과 기행, 이를 둘러싼 노론 벽파의 정치적 공세 속에서 극도로 악화됐다. 1762년 영조는 세자에게 스스로 뒤주에 들어가라 명했고, 세자는 8일 만에 뒤주 안에서 굶어 죽었다. 이 사건은 이후 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노론과 남인·소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불씨로 남았으며, 정조는 아버지를 신원하기 위해 화성 축성 등 여러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왜 일어났나
영조는 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에게 기대가 컸으나 세자는 아버지의 꾸중 속에 병들어 갔고, 대리청정을 맡은 뒤 노론과 부딪쳤다. 사람을 죽이고 궁을 몰래 나가는 일이 이어졌고, 1762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변했다.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인 동시에 노론과 세자의 정치적 충돌이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영조는 곧 후회하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자의 아들 정조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쌓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어떻게 볼지를 두고 시파와 벽파가 갈라져 정조·순조 대의 정치를 흔들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이 사건을 안에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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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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