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작업을 홀로 주도했다. 세종실록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정인지 역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우리 전하께서 친히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셨다"고 밝혀, 창제 자체는 세종 개인의 작업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자였던 문종 등 소수의 직계 가족만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집현전 학자들은 문자가 완성된 이후, 그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하고 한자음을 정리하는 후속 작업에 참여했을 뿐이며, 부제학 최만리 등 집현전 내 다수는 오히려 새 문자 반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443년 완성된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자음과 하늘·땅·사람을 형상화한 모음으로 구성된,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표음문자였다.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되며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았다. 이 문자는 이후 20세기 들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가 됐다.
왜 일어났나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로 호소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보았다. 우리말은 중국말과 달라 한자로는 소리를 적을 수 없었다. 1443년 12월 세종은 28자를 만들었다고 실록은 짧게 적고, 최만리 등이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면 오랑캐가 된다며 반대했으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반포했다.
무엇이 달라졌나
새 글자는 처음에 언문이라 낮잡아 불렸고, 연산군은 한글 벽서 사건 뒤 사용을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과 서민 사이에서 편지와 소설로 퍼져 나갔고, 갑오개혁 때 국문이 되었으며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0년 안동에서 해례본이 발견되어 글자를 만든 원리가 확인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 세종실록 102권
-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민정음
- 위키백과 한글
- 나무위키 한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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