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義湘, 625~702)은 원효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길은 갈렸다. 원효는 돌아왔고, 의상은 갔다.
삼국유사 의해편의 조목 이름은 「의상전교(義湘傳敎)」다. 의상이 가르침을 전했다는 뜻이다.
──
**떠난 사람**
의상은 진골 귀족 출신이다. 스물아홉에 출가했고, 당나라로 가려다 고구려 국경에서 첩자로 몰려 붙잡히기도 했다.
뒤에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이르렀다. 거기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그 집 딸이 선묘(善妙)였다. 선묘는 의상을 사모해 혼인을 청했다. 의상은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감화시켜 보리심을 내게 했다.
선묘가 서원을 세웠다.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의상은 종남산으로 가서 지엄(智儼)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2조로, 그 문하에서 3조가 되는 법장(法藏)도 함께 공부했다.
의상이 화엄 사상의 요체를 210자로 압축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은 것이 이 시기다. 스승 지엄이 감탄했다고 전한다.
──
**돌아오는 길**
의상은 671년 귀국했다. 당이 신라를 치려 한다는 정보를 전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귀국길에 의상은 선묘의 집에 들러 그동안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주려고 법복과 그릇 등을 담은 상자를 준비해 두었는데, 전하기도 전에 배가 떠나 버렸다. 그는 상자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배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선묘가 상자를 바다로 던지며 빌었다. 이 상자가 저 배에 닿기를. 상자가 물결을 타고 배에 이르렀다.
선묘가 다시 빌었다. 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를 신라까지 안전히 이끌기를. 그리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용이 되어 배를 호위했다.
──
**떠 있는 돌**
의상이 신라에 돌아와 화엄을 전할 절터를 찾았다. 태백산 자락에 자리를 정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다른 무리가 있었다.
삼국유사는 이들을 권종이부(權宗異部)라 적는다. 의상의 화엄종과는 다른 계통의 집단이라는 뜻이다. 오백 명쯤 되었다고 한다.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그 무리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바위가 공중에서 오르내리자 무리가 놀라 흩어졌다.
의상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이름을 부석사(浮石寺) — 떠 있는 돌의 절이라 했다.
676년, 문무왕 16년의 일이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다. 아래로 줄을 넣으면 통과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무량수전 뒤편에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 있다.
──
**여기서도 원전 문제가 있다**
앞 편에서 원효의 해골 물이 삼국유사에 없다는 것을 보았다. 선묘 이야기에도 비슷한 사정이 있다.
선묘가 상자를 던지고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는 극적인 장면 — 이 상세한 서사의 원출처는 『송고승전』이다. 원효 해골 물과 같은 책이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에도 부석사 창건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지만, 서술의 초점이 다르다. 삼국유사는 절터에 있던 무리를 물리치고 절을 세운 대목에 무게를 둔다.
두 기록이 완전히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선묘 이야기의 애틋한 세부 — 상자를 던지는 장면, 몸을 던지며 비는 대목 — 는 중국 승전에서 온 것이다.
왜 중국 기록에 신라 승려의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히 남았을까. 의상이 중국에서 유학했고, 중국 화엄종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문 법장은 뒷날 의상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가 실제로 전한다.
──
**의상이 남긴 것**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을 폈다. 그래서 그를 부석존자라 하고, 그의 화엄종을 부석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자가 많았다. 삼국유사는 그중 열 사람을 꼽으며 아성(亞聖)이라 불렀다고 적는다. 전국에 화엄십찰이라 불리는 절들이 세워졌다.
원효와 의상은 자주 대비된다. 원효는 파계하고 민중 속으로 갔고, 의상은 계율을 지키며 교단을 세웠다. 원효는 저술로 남았고, 의상은 제자와 절로 남았다.
둘 중 누가 나은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가 두 사람을 나란히 실었다는 점은 볼 만하다. 얽매이지 않은 자(불기)와 가르침을 전한 자(전교) — 두 조목의 제목 자체가 그 차이를 말한다.
──
**한 가지 덧붙이면**
선묘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실제로 부석사는 그런 맥락에서 자주 소개된다.
그런데 기록을 따라 읽으면 조금 다른 것이 보인다. 선묘가 세운 서원은 혼인이 아니었다.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배를 지켰고, 절터를 열었다. 부석사가 서 있는 것이 그 서원의 결과다.
거절당한 사랑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 관계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두 읽기 모두 이 기록 안에 근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