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 해골 물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없다

617 · 경주 분황사 · 압량군 불지촌

원효(元曉, 617~686)에 대해 한국인이 아는 이야기는 대개 하나로 수렴한다. 당나라 유학길에 밤중에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물을 마셨는데 달았다. 아침에 보니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구역질을 하다가 깨달았다 —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 장면은 삼국유사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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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은 무엇을 적었나**

삼국유사 권4 의해편의 원효 조목 제목은 「원효불기(元曉不羈)」다. 불기(不羈)는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조목이 담고 있는 것은 이렇다. 원효의 출생과 밤나무 이야기, 태몽, 스스로 학문을 깨친 일,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설총의 출생, 파계 이후 무애가를 부르며 떠돈 일, 『금강삼매경소』를 지은 일, 입적한 뒤 분황사에 모셔진 일.

해골 물은 여기 없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어디서 왔는가. 중국 측 기록이다. 북송의 찬녕이 988년에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원효의 전기가 실려 있고, 거기 관련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송고승전의 서술도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그 책은 원효가 무덤에서 잠을 자고 난 뒤 그곳이 무덤임을 알게 됐다는 정도로 적는다. 해골 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셨다는 구체적인 장면, 그것을 알고 토했다는 묘사는 후대에 덧붙은 것으로 본다.

즉 우리가 아는 원효의 대표 일화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중국 기록에서 왔고, 그마저도 상당히 각색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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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삼국유사의 원효는 어떤 사람인가**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나다**

원효는 압량군(지금의 경산) 불지촌 밤나무 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만삭이 되었을 때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갑자기 해산했다. 급해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그 안에 누웠으므로, 그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그 나무의 밤은 유난히 컸다. 한 알이 바리때 하나에 가득 찼다고 한다. 일연은 이 대목에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 어떤 절의 종이 밤 두 알을 하루 끼니로 받았는데 관가에 소송을 냈고, 관리가 밤을 가져다 보니 한 알이 바리때에 가득 차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요석공주 — 원효가 먼저 청했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으려 한다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태종무열왕이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그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다. 왕이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데려오게 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고, 관리는 그를 요석궁으로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다.

공주는 아이를 가졌고, 설총(薛聰)을 낳았다.

주목할 것은 순서다. 이 기록에서 원효는 유혹당한 것이 아니다. 먼저 노래를 불러 뜻을 알렸고, 왕이 그 뜻을 알아듣고 주선했다.

그리고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아들 설총은 뒷날 신문왕 때 관료로 발탁됐고,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두 사람의 인연이 왕실에 의해 사실상 공인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소성거사 — 스스로 내려오다**

파계한 뒤 원효는 승복을 벗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성(姓)이 작다는 뜻이니, 낮은 신분을 자처한 셈이다.

어느 날 광대들이 놀리는 큰 표주박을 얻어 그것을 도구로 삼고 이름을 무애(無㝵)라 했다. 『화엄경』의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 표주박을 들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 개의 마을과 만 개의 부락을 돌아다녔다.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했다.

삼국유사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적는다.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 한마디는 다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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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왜 중요한가**

7세기 신라에서 불교는 왕실과 귀족의 종교였다. 경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교리는 어려웠으며, 절은 도성에 있었다.

원효가 한 일은 그 경계를 허문 것이다. 승복을 벗고, 표주박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골을 돌았다. 어려운 교리 대신 부처의 이름 한마디를 남겼다.

동시에 그는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다.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해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책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읽혔다. 서로 다른 종파의 주장을 조화시키려 한 화쟁(和諍)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높은 이론을 세운 사람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이다. 삼국유사가 그를 「불기」 — 얽매이지 않음 — 라는 제목 아래 놓은 이유일 것이다.

**금강삼매경소를 쓴 일**

삼국유사에 이런 일화가 있다. 왕이 백고좌 법회를 열어 『금강삼매경』을 강의할 사람을 찾았는데, 원효가 뽑혔다.

원효는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책상을 놓고 그 위에서 글을 썼다. 소의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놓았다 하여 이 주석서를 각승(角乘)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닷새 만에 다섯 권을 지었다. 그런데 강의 전날 누군가 그 책을 훔쳐 갔다. 원효는 사흘을 미뤄 달라 청하고 다시 세 권으로 줄여 썼다. 그것이 오늘날 전하는 『금강삼매경론』이다.

강의를 마치고 원효가 말했다.

지난날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는 내가 끼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대들보 하나를 놓는 자리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

승려들이 부끄러워하며 참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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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린 소상**

원효는 686년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일흔이었다.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했다.

어느 날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연은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자기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다는 것이다.

13세기의 승려가 7세기의 조각상을 보고 적은 문장이다. 이런 대목이 삼국유사 곳곳에 있다. 일연은 자주 현장에 갔고, 본 것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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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원전 사이**

다시 해골 물로 돌아가 보자.

그 이야기가 가짜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효가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은 사실이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은 그의 사상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힘이 있다.

다만 알아둘 만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정작 그 인물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우리 문헌에는 없을 수 있다는 것.

삼국유사의 원효는 해골 물을 마시지 않는다. 대신 노래를 불러 공주를 얻고, 승복을 벗고, 표주박을 두드리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죽은 뒤 그의 상은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오백 년을 서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이야기인지는, 읽는 사람이 정할 일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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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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