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면과 지은 — 하늘로 오른 여종, 몸을 판 딸

890 · 경주 (분황사 동쪽) · 강주

삼국유사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 실려 있다. 왕도 아니고 고승도 아닌, 종이거나 가난한 딸인 사람들이다.

두 편을 읽어보자. 하나는 감통(感通)편에, 다른 하나는 효선(孝善)편에 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이 책 전체의 마지막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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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면 — 지붕을 뚫고 올라가다**

경덕왕 때, 강주(지금의 진주 일대)에 신도 수십 명이 미타사라는 절을 짓고 만일(萬日)을 기약해 염불 모임을 만들었다.

그중 아간(阿干) 벼슬의 귀진(貴珍)이라는 사람 집에 욱면(郁面)이라는 여종이 있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승려를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종이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고 미워했다. 그래서 매번 곡식 두 섬을 주며 하룻저녁에 다 찧으라고 시켰다.

욱면은 초저녁에 다 찧고 절에 가서 염불했다.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을 꿰어 말뚝에 맨 다음, 합장한 채 좌우로 움직이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

절의 승려들이 이 소리를 듣고 욱면에게 법당에 들어와 예에 따라 정진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의 음악이 서쪽에서 들려왔다. 욱면이 솟구쳐 올라 지붕을 뚫고 나갔다. 서쪽 교외로 가서 몸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며 천천히 사라졌다. 음악은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법당에는 지금도 뚫린 구멍이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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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무게**

짧은 이야기지만 몇 가지가 눈에 띈다.

먼저 신분이다. 욱면은 종이다. 절 안에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서서 염불했다. 주인은 종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며 일을 늘려 방해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서방정토로 간다. 주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니다.

손바닥을 뚫어 노끈을 꿰었다는 대목은 읽기 괴로울 만큼 구체적이다. 졸음을 쫓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종의 몸으로 낮 일을 다 하고 밤에 염불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늘의 소리가 그를 법당 안으로 불러들이는 장면도 의미가 있다. 사람이 만든 신분의 경계를, 밖에서 온 소리가 무효로 만든다.

정토신앙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누구나 염불로 왕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의 사례로 읽힌다. 신라 하대에 아미타 신앙이 널리 퍼졌고, 신분과 무관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아래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일연이 이 이야기를 실은 자리는 감통편이다. 감통은 정성이 통해 감응을 얻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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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 삼국유사의 마지막 이야기**

효선편의 마지막 조목은 「빈녀양모(貧女養母)」다. 가난한 여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라는 뜻이다. 이것이 『삼국유사』 전체의 마지막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지은(知恩)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눈먼 어머니를 홀로 모셨다. 나이 서른둘이 되도록 시집가지 않았다.

품을 팔고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으나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고 쌀 열 몇 섬을 받았다.

낮에는 그 집에서 일하고 저물면 집에 돌아와 밥을 지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사나흘이 지나자 어머니가 말했다.

예전에는 거친 밥도 맛이 달았는데, 요즘은 밥이 좋은데도 맛이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이 칼로 찌르는 것 같구나. 어찌 된 일이냐.

딸이 사실대로 말했다.

어머니가 통곡하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구나. 차라리 내가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모녀가 붙들고 우니 지나가던 사람들도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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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랑 효종랑(孝宗郎)이 지나다 이 광경을 보았다.

삼국유사는 여기에 한 대목을 덧붙인다. 낭도들이 사정을 알아보고 와서 이렇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 저 여자는 어머니의 입과 배만 봉양할 줄 알았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서로 껴안고 우는 것입니다.

효종랑이 눈물을 흘리며 곡식 백 섬을 보냈다. 그의 부모도 옷 한 벌을 보냈다.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 거두어 보냈다.

이 일이 대궐에 알려지자 진성여왕이 곡식 오백 섬과 집 한 채를 내리고, 군사를 보내 그 집을 지켜 약탈당하지 않게 했다. 그 마을을 표창해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뒤에 지은은 그 집을 희사해 절로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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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이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적는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있다. 「효녀 지은」이라는 제목이다.

큰 줄거리는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지은의 아버지 이름이 연권(連權)이라고 밝히고, 효종랑이 몸값을 갚아 지은을 다시 양민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왕이 효종랑에게 헌강왕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적는다.

삼국유사는 지은이 진성여왕 때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뒤에 자기 집을 절로 만들어 양존사라 했다는 것을 적는다. 이 두 가지는 삼국유사에만 있다.

무엇보다 앞서 인용한 낭도들의 말 — 입과 배만 봉양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다는 대목 — 이 삼국유사 쪽의 특징이다.

이것은 효에 대한 다른 관점이다.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는 효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효선편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끝은 절을 짓는 것으로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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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선편이라는 자리**

효선편에는 다섯 이야기가 있다. 진정사 이야기, 김대성 이야기, 다리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한 향득 이야기, 지은 이야기, 그리고 아이를 묻으려 한 손순 이야기다.

출가한 승려에게 효는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다. 집을 떠나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부모를 봉양하고 대를 잇는 것이 효의 근본인데, 승려는 그 둘 다 하지 않는다. 불교가 들어온 뒤로 이 문제는 계속 논쟁거리였다.

일연은 책의 마지막을 이 편목에 할애했다.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들은 대개 이렇게 끝난다 — 부모를 봉양한 사람이 결국 절을 세우거나 불도에 들어선다.

효와 불교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효가 불도로 이어진다는 것. 그것이 이 편목의 논지로 읽힌다.

앞서 보았듯 일연 자신도 만년에 국존 자리를 내려놓고 아흔 넘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그 무덤 가까운 인각사에서 남은 5년을 보냈다.

그가 자기 책의 마지막에 무엇을 놓았는지 다시 보게 되는 이유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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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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