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세 가지를 미리 알다 — 향기 없는 모란과 개구리 울음

632 · 경주 (영묘사 옥문지 · 낭산)

『삼국유사』 기이편에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라는 조목이 있다. 기(幾)는 흔히 '어찌'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다른 뜻이다 — 기미, 낌새. 선덕여왕이 미리 낌새를 알아차린 세 가지 일이라는 제목이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632년에 즉위했다. 이름은 덕만(德曼), 진평왕의 맏딸이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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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 향기 없는 모란**

당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 세 가지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씨를 뜰에 심게 했더니,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향기가 없었다.

훗날 신하들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답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내가 배우자 없이 홀로 있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일연은 이 대목 뒤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을 짐작한 점 또한 알아줄 만하다고. 실제로 신라에는 선덕·진덕·진성 세 명의 여왕이 나왔다.

**둘째 — 겨울에 우는 개구리**

영묘사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에서,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떼 지어 울었다.

왕이 급히 장수들에게 군사 이천을 주어 서쪽 교외로 가라 했다.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골짜기가 있을 테니 그곳에 적병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亐召)가 병사 오백을 이끌고 숨어 있었다. 신라군이 포위해 몰살시켰다. 뒤이어 온 백제군 천이백 명도 모두 죽였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고 우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은 여자의 생식기를 뜻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은 흰색이며, 흰색은 서쪽을 뜻한다. 그래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또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셋째 — 자기 죽을 날**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다.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라.

신하들이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으니, 낭산(狼山) 남쪽이라고 답했다.

과연 그날에 왕이 세상을 떠났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뒤, 문무왕이 그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선덕여왕의 말뜻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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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에는 향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모란은 실제로 향기가 있는 꽃이다.

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향이 난다. 그러니 씨를 심어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었다는 기록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여왕의 총명함을 보여주기 위한 설화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다 — 『삼국사기』는 같은 일화를 다르게 적는다. 삼국사기에서 이 모란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왕이 되기 전, 아버지 진평왕 때의 일로 나온다. 공주 시절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인 것이다.

같은 이야기가 두 책에서 다른 시점에 놓여 있다. 이런 차이는 삼국유사를 읽을 때 자주 만나게 된다.

**둘째 이야기의 정치적 맥락**

여근곡 이야기는 노골적인 성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옥문, 여근, 남근이 그대로 등장한다. 고대 기록에서 이런 표현은 드물지 않지만, 여왕이 직접 이런 해석을 내놓는 장면은 눈길을 끈다.

연구자들은 이 설화가 여왕의 통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선덕여왕의 재위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백제의 공격이 거셌고,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자가 왕이라 이웃 나라가 업신여긴다며 자기 친족을 왕으로 보내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재위 말년에는 비담이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여왕의 비범한 예지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설화의 형태를 띤 셈이다.

**셋째 이야기가 남긴 것**

도리천 이야기는 실제 유적과 연결된다.

낭산 남쪽에는 지금도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아래에 사천왕사 터가 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때인 679년에 완성됐다. 불교 우주관에서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고 그 위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으니, 사천왕사 위쪽 무덤이 도리천이 된다는 구조다.

다만 순서를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의 성격이 드러난다. 사천왕사는 여왕이 죽고 삼십 년 뒤에 지어졌다. 그러니 이 일화는 사천왕사가 세워진 뒤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이미 있는 사실을 예언의 성취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신라 사람들이 자기네 왕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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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을 기억하는 방식**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동안 분황사를 짓고, 첨성대를 세웠으며, 황룡사 구층탑을 올렸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그의 시대에 부상했다. 통일의 기반이 이 시기에 놓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가 전하는 것은 이런 업적이 아니다. 꽃 그림을 보고 향기를 알아맞히고, 개구리 울음소리로 적의 위치를 짚어내고, 자기 죽을 날을 미리 말한 이야기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방식이다. 정사가 업적을 적는다면, 이 책은 사람들이 그 인물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를 적는다.

어느 쪽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가는, 읽는 사람이 판단할 몫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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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유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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