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년, 경주. 일흔여섯 살의 노승 하나가 잿더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황룡사 터였다. 신라 진흥왕이 짓기 시작해 선덕여왕 때 구층탑을 올린, 한때 한반도에서 가장 높았던 건축물. 탑 하나의 높이만 80미터를 넘었다고 전한다. 각 층은 신라를 위협하던 아홉 나라를 상징했고, 탑을 세우면 그 나라들이 항복해 온다고 했다. 호국(護國)이라는 말이 가장 거대한 형태로 구현된 물건이었다.
그것이 1238년 몽골군의 방화로 불탔다. 일연이 서 있던 1281년, 그 자리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이 노승의 이름은 일연(一然)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무렵, 『삼국유사』를 쓰고 있었다. 그 책의 탑상(塔像)편에는 황룡사 구층탑 조가 실려 있다 — 탑이 어떻게 세워졌고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적은 글이다. 다시 말해 일연은, 자기가 글로 남기고 있던 그 탑이 재로 변한 현장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
이 사실 하나가 『삼국유사』를 읽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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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년이 어떤 해였는지 짚어보자. 고려는 1231년부터 약 30년간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강화도로 천도해 버텼지만 1259년 결국 강화했고, 끝까지 항전하던 삼별초는 1273년 제주에서 전멸했다. 그리고 1274년과 1281년, 고려는 몽골(원)의 일본 원정에 병력과 배와 군량을 대야 했다.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지만, 그 대가는 고려가 치렀다.
국왕 충렬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였다. 고려 왕실은 대대로 원 공주와 혼인하게 됐고, 왕의 시호에는 원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가 붙기 시작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 백 년 가까이 이어진 이름들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한 승려가 옛이야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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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이(紀異)편 첫 조목은 「고조선(왕검조선)」이다.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 —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곰이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그 이야기 — 가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형태가 여기 있다. 그전까지 어떤 역사서도 단군을 이렇게 앞세우지 않았다. 150년 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단군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일연은 왜 단군으로 시작했을까. 흔한 설명은 이렇다 — 몽골 지배 아래에서 민족의 뿌리를 세우려 했다는 것.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조심할 부분이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져 20세기 초 동아시아로 들어온 근대의 발명품이다. 13세기 승려에게 20세기의 민족의식을 그대로 투사하면 그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옷을 입히는 것이 된다.
일연 자신이 기이편 서문에서 밝힌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는 중국 고대의 성인들 — 복희, 염제, 그리고 여러 제왕들 — 이 모두 기이한 탄생 설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열거한다. 그런 다음 이렇게 쓴다. 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 「기이」를 여러 편목의 첫머리에 실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방어의 문장이다. 누구를 향한 방어인가. 유교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사대부들, 그리고 그 대표작인 『삼국사기』를 향한 것이다. 신이한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니 역사에서 빼야 한다는 태도에 맞서, 일연은 중국의 성인들도 다 그랬다고 받아친다. 우리 시조의 신이함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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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는다. 총 144항목 중 전부를 다룰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빠짐없이 다룰 것이다. 단군과 주몽과 박혁거세, 선덕여왕과 수로부인, 원효와 의상, 조신의 꿈과 김대성의 두 생, 이차돈의 흰 피와 처용의 춤 —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어떤 이야기인지는 흐릿한 것들이다.
읽는 방식에 대해 두 가지를 약속해 두자.
첫째, 이 시리즈에서 "삼국유사는 ~라고 기록한다", "~라고 전한다"는 표현은 책의 내용을 전달한다는 뜻이지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됐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금석문에 남아 있다"고 쓴 대목은 삼국유사 바깥의 독립된 증거로 검증되는 내용이다. 이 두 층위를 문장 단위로 구분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원칙이다.
둘째,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원전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원효의 해골 물이다 — 그 장면은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어긋남이 나올 때마다 원전이 실제로 무엇을 적었는지 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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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연의 비석에는 『삼국유사』가 적혀 있지 않다.
그가 1289년 인각사에서 여든넷에 입적한 뒤, 문인 민지가 비문을 지었다. 거기에는 그가 남긴 불교 저술 여든 몇 권의 목록이 적혀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그의 이름을 남긴 그 책, 『삼국유사』는 없다. 당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국존(國尊)에까지 오른 대선사의 이력에 굳이 적을 만한 저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승려가, 정작 자기 이력서에는 올리지 못할 잡록을 만년에 붙들고 있었다. 그것이 700년 뒤 우리가 고대사를 아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됐다. 이제 그가 주운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