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년 정월,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승려 묘청과 서경 세력이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한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이들은 인종에게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 개경은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임금을 황제라 칭하며 독자 연호를 세우고(칭제건원), 오만한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풍수도참의 언어로 포장돼 있었지만 알맹이는 명확한 정치 노선이었다. 금에 대한 사대를 뒤집고, 개경 문벌의 판을 갈아엎자는 것.
이 사건은 흔히 "자주 대 사대"의 대결로 요약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도를 놓고 보면 한 겹이 더 보인다. 서경이 어디인가 — 평양, 고구려의 수도다. 태조가 북진의 전초로 아꼈고, 고구려 계승의식이 공간의 형태로 남아 있던 도시다. 그 서경이 도전한 개경 조정의 사령탑은 누구였나 — 신라 왕경 경주에서 온 가문의 김부식이었다. 즉 묘청의 난은 고려라는 나라 안에 이백 년 넘게 잠복해 있던 두 개의 기억, 고구려의 기억과 신라의 기억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기도 하다. 반란 진압 10년 뒤 김부식의 손에서 신라 중심의 정사가 나오는 것은, 이 구도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진압전의 총사령관(원수)이 된 김부식이 출정 전에 한 첫 일은, 개경에 남아 있던 서경 출신 인사들 — 정지상·백수한·김안 — 을 왕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처형한 것이었다. 반란 연루가 명분이었으나 절차를 건너뛴 처형이었고, 천재 시인 정지상과의 문학적 경쟁 관계가 겹치며 사적 원한이라는 뒷말을 남겼다(프롤로그의 귀신 설화가 여기서 자란다). 전쟁 자체는 김부식의 방식대로 흘러갔다 — 속전속결 대신 포위와 고사(枯死). 1년여의 농성 끝에 1136년 2월 서경성은 함락됐다.
승자가 된 김부식은 문하시중, 즉 수상의 자리에 올랐고, 서경 세력은 궤멸했으며, 칭제건원과 북벌의 언어는 고려 정치에서 오랫동안 금기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확정된 사실이다. 이 사건이 "조선 역사 천년의 운명을 가른 대사건"이었는지는 —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이고, 그 해석은 790년 뒤 식민지 조선의 한 사학자에 의해 폭발적으로 제기된다. 그 이야기는 10편에서 다룬다. 그 전에, 승자가 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