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5월에 한양이 함락됐다. 춘추관 사고가 불탔다. 충주 사고도, 성주 사고도 불탔다.
남은 것은 전주 사고 하나였다. 그리고 왜군은 호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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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고에 있던 것**
전주 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이 47개 궤에 담겨 있었다. 그 밖에 다른 전적 556책이 15개 궤에 들어 있었다.
실록 외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역대병요』, 『진법』 등이다. 중국 서적도 많았다.
그리고 바로 옆 경기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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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기로 하다**
이것을 옮기자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 태인(지금의 정읍) 지역의 선비들이다.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다.
**오희길(吳希吉)** — 경기전 참봉이었다. 태조 어진을 관리하는 자리다.
**이광(李洸)** — 전라감사.
이들과 여러 백성이 함께 실록과 어진을 옮겼다.
목적지는 내장산이었다. 정읍 남쪽의 산으로, 험한 지형에 절과 암자가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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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옮겼나**
궤 62개다. 책만 1,170책이 넘는다.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지고 날라야 했다.
동원된 인원과 소요된 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다만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눠 옮겼고, 상당한 인력이 동원됐다는 점은 공통된다.
처음에는 내장산 은적암으로, 뒤에 더 깊은 용굴암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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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켰다**
옮긴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그 자리에 머물며 실록을 지켰다. 번갈아 가며 밤을 새웠다.
두 사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안의가 며칠, 손홍록이 며칠, 혹은 함께 며칠 — 이런 식으로 당번을 나눠 지킨 날짜가 적혀 있다.
1592년 6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1년 동안이었다.
두 사람은 관직이 없었다. 이 일을 하라고 시킨 사람도 없었다. 사재를 털어 옮겼고, 그 자리에 남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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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기다**
1593년, 왜군이 호남을 노리는 정황이 나타나자 조정에서 사람을 보냈다.
춘추관 대교 조유한(趙維韓)이 파견되어 실록을 인수했다.
이때부터 실록은 국가의 손으로 넘어가 이동을 시작한다. 해주로 갔다가, 강화부로, 다시 영변부로, 또 강화부로.
전쟁이 끝난 뒤 이 원본은 강화에 자리를 잡았고, 1660년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정족산 사고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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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없었다면**
가정을 해보자.
전주 사고본까지 불탔다면 어떻게 됐을까.
태조부터 명종까지 200년의 실록이 사라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사를 연구할 기본 자료가 없어졌을 것이다.
조선 정부가 전쟁 뒤 실록을 다시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전주 사고본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저본으로 네 부를 다시 만들어 다섯 사고에 나눠 두었고, 그것들이 오늘까지 전해졌다.
지금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92년 여름 두 선비가 내린 결정에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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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는 방식**
안의와 손홍록의 이름은 오랫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2018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이들이 실록을 옮기기 시작한 날을 기려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정했다.
전북 정읍에는 두 사람을 기리는 시설이 있고, 내장산에는 실록을 보관했던 자리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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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생각해 볼 것**
앞 편에서 조선이 실록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제도들을 보았다. 여러 부를 만들어 나눠 두고, 산속에 보관하고, 정기적으로 말리고.
그런데 1592년에 실제로 실록을 살린 것은 제도가 아니었다.
네 사고 중 세 곳이 불탔다. 제도는 절반 이상 실패했다.
남은 하나를 살린 것은, 그 지역에 살던 두 사람이 그것을 옮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제도는 조건을 만들지만, 마지막에는 사람이 결정한다. 이 사건은 그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