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만드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조선은 이 문제를 꽤 이르게 인식했고, 나름의 해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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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은 분산이었다**
한 부만 만들지 않았다. 여러 부를 만들어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나눠 두었다.
조선 전기의 사고(史庫)는 네 곳이었다.
**춘추관 사고** — 서울, 궁궐 안에 있었다. **충주 사고** — 충청도 충주 관아. **전주 사고** — 전라도 전주, 경기전 옆. **성주 사고** — 경상도 성주 관아.
한 곳이 불타도 다른 곳에 남는다는 발상이다.
오늘날 데이터 백업에서 지리적으로 떨어진 여러 곳에 복제본을 두는 것과 같은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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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네 사고 모두 도심의 관아 안에 있었다. 관리하기는 편했지만 위험했다.
실제로 이 점을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명종 21년(1566), 사고를 산속으로 옮기자는 건의가 올라왔다.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기고,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면서 땅을 지급해 인근 백성들이 지키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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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 성주에서 불이 나다**
사실 그 건의보다 앞서 경고가 있었다.
중종 33년(1538) 11월 6일, 성주 사고에 불이 났다.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부 탔다.
원인은 실화였다. 사고를 관리하던 사람이 실수로 불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정은 나머지 사고에서 다시 인쇄하고 필사해 성주로 보냈다. 그런데 사고의 위치는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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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춘추관·충주·성주 세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탔다.
남은 것은 전주 사고 하나였다.
그리고 그 전주 사고본도 그대로 있었다면 함께 탔을 것이다. 그것을 지고 산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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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 다시 짓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실록을 다시 만들었다.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살아남은 전주 사고본을 저본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네 부를 다시 찍었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재정 형편에서 이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고를 산속에 두었다.
**춘추관** — 서울 (뒤에 화재로 소실) **강화 마니산** — 뒤에 정족산으로 옮김 **태백산** — 경상도 봉화 **묘향산** — 평안도, 뒤에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 **오대산** — 강원도 평창
원본인 전주 사고본은 강화로 옮겨 보관했다. 여러 곳을 거쳐 1660년 정족산 사고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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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 기술**
사고 건물은 2층 누각 형태로 지었다. 습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실록은 궤에 담아 보관했고, 정기적으로 꺼내 말렸다. 이것을 포쇄(曝曬)라 한다. 바람이 잘 통하는 맑은 날 책을 펴서 말리는 작업으로, 보통 2~3년에 한 번씩 했다.
포쇄는 사관이 직접 내려가 감독했다. 이때 실록의 상태를 점검하고 목록과 대조했다.
방충을 위해 궤 안에 약재를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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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두는 것의 의미**
산속 사고는 접근이 어렵다. 관리하기 불편하고, 포쇄하러 가는 것만도 일이다.
그럼에도 산으로 옮긴 것은, 전쟁을 겪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다.
도시는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공격받는다. 산속 절 근처라면 군대가 지나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 판단은 대체로 맞았다. 병자호란 때도, 그 뒤의 여러 혼란기에도 산속 사고들은 대체로 보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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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춘추관 사고는 이괄의 난(1624) 등을 거치며 소실됐다.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옮겨졌다.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 이야기는 별도로 다룬다.
현재 남한에 있는 것은 정족산 사고본(서울대 규장각)과 태백산 사고본(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그리고 환수된 오대산 사고본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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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사람들이 세운 원칙 — 한 곳에 두지 말 것, 서로 멀리 둘 것, 정기적으로 점검할 것.
지금 우리가 중요한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