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 사초가 사람을 죽이다

1498 7월 · 한양

1498년(연산군 4)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이었다.

실록청 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이었다. 제출된 사초를 검토하다가 자기에 관한 대목을 발견했다. 김일손(金馹孫)이라는 사관이 그의 비행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이극돈이 김일손에게 그 부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김일손은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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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다른 것을 찾아냈다.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의제(義帝)는 중국 초나라의 회왕이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종직이 이 인물을 애도하는 글을 지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고사에 관한 글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읽으면 이렇게 된다 — 의제는 단종이고, 항우는 세조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일을 빗댄 글이라는 해석이다.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이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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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초를 보다**

1498년 7월 1일자 『연산군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이 차비문에 나아가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다고 청했고, 도승지 신수근이 출납을 맡았으며, 사관은 참여하지 못했다.

사관이 참여하지 못한 자리에서 사초에 관한 논의가 이뤄진 것이다.

연산군은 사초를 보았다. 그리고 김일손을 직접 국문했다. 7월 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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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연산군의 논리는 이랬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제출한 사초에 세조 대의 일을 그렇게 적은 것은 세조에 대한 반역이다.

처벌은 가혹했다.

김종직은 이미 6년 전에 죽었다. 무덤을 파서 시신의 목을 베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은 능지처참됐다.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목이었다.

김굉필·정여창·박한주 등은 유배됐다.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혹은 붕당을 이뤘다는 이유였다.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는 죄로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 등이 파직됐다. 사건을 처음 알린 이극돈도 결국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조의제문을 논할 때 이들을 옹호한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들도 처벌됐다.

7월 1일에 시작해 7월 27일에 끝났다. 김일손 국문일부터 세면 보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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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인가 사화인가**

이 사건을 무오사화라 부르는데, 한자 표기가 둘이다.

士禍 —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史禍 — 역사 기록 때문에 일어난 화라는 뜻이다.

둘 다 쓰인다. 조선의 4대 사화 중 사초에서 비롯된 것은 이 사건뿐이라, 두 번째 표기가 이 사건의 특수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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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갈래**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견해가 나뉜다.

**전통적 해석** — 유자광과 이극돈의 개인적 원한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극돈은 자기 비행이 사초에 적힌 데 앙심을 품었고,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이가 나빴다. 두 사람이 연산군을 부추겼다는 설명이다.

**정치 구도로 보는 해석** —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충돌로 본다. 성종 대에 성장한 사림이 훈구 세력에게 밀려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왕권 강화로 보는 해석** — 연산군이 자기를 견제하던 대간 세력을 꺾기 위해 사초 문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벌 대상에 삼사 관원들이 대거 포함됐다.

**사초 자체의 문제를 짚는 해석** — 국가 공문서인 사초에 특정 정치적 해석이 담긴 글을 실은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손이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알면서도 사초에 올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하나로 환원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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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남긴 것**

무오사화는 조선의 기록 제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첫째, 사초의 비밀이 깨졌다.** 왕이 사초를 보았고, 그 내용으로 사람을 죽였다. 이후 사관들이 무엇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사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목이 달아나도 붓을 굽히지 않는다는 말이 실제로 목이 달아나는 일이 되었다.

**셋째, 그럼에도 제도 자체는 유지됐다.** 연산군은 6년 뒤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폐위된 왕의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가 됐다.

『연산군일기』에는 그가 사초를 본 일이 적혀 있다. 원칙을 깬 왕의 행위가, 바로 그 원칙에 의해 기록으로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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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덧붙이면**

김일손은 자기가 쓴 것 때문에 죽었다.

이극돈이 빼달라고 했을 때 뺐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절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어리석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적은 내용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의제문 전문은 『연산군일기』에 실려 있다. 그것을 문제 삼아 사람을 죽인 기록 안에, 문제가 된 그 글이 함께 실려 있는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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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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