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은 왕이 살아 있을 때 쓰지 않는다. 왕이 죽은 뒤에 만든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살아 있는 권력이 자기 기록을 손대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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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 사초와 시정기**
실록의 재료는 여러 가지다.
**사초(史草)** — 사관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기록이다. 사관은 왕이 신하를 만나는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오간 말을 적었다. 여기에는 사관 개인의 논평도 들어간다.
사초는 두 벌을 만들었다. 하나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하나는 사관이 집에 보관했다. 집에 둔 것을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한다. 실록을 편찬할 때 이것을 제출받았다.
**시정기(時政記)** — 춘추관에서 각 관청의 문서를 모아 정리한 기록이다. 사초가 사관 개인의 기록이라면 시정기는 공적 문서의 집성이다.
**그밖의 자료** — 승정원일기, 각 관청의 등록, 개인 문집, 지방의 보고서 등이 두루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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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 실록청 설치**
왕이 죽으면 새 왕이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한다. 상설 기구가 아니라 임시 기구다.
최고 책임자는 총재관(摠裁官)으로, 대개 정승급이 맡았다. 그 아래 도청(都廳)을 두고, 도청 아래에 방(房)을 여러 개 두었다.
방은 보통 1방·2방·3방으로 나뉘었다. 재위 기간이 길어 분량이 많으면 6방까지 늘렸다.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이 그런 경우다.
각 방이 재위 연수를 나눠 맡았다. 1방이 1년, 2방이 다음 1년, 3방이 그다음 1년, 다시 1방이 그다음 1년 —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분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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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 초초, 중초, 정초**
편찬은 세 단계를 거친다.
**초초(初草)** — 각 방에서 시정기·사초 등 자료를 뒤져 중요한 사실을 뽑아 연월일 순으로 배열한다. 1차 원고다. 이것을 도청에 넘기면 각 방의 임무는 끝난다.
**중초(中草)** — 도청의 낭청이 초초를 교열한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빠진 것을 넣고, 불필요한 것을 뺀다. 2차 원고다.
**정초(正草)** —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중초를 다시 교열한다. 문장과 체제를 통일하고 많은 부분을 깎아낸다. 이것이 최종본이다.
정초가 완성되면 활자로 인쇄해 사고에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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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말해주는 것**
이 과정을 거치면서 분량이 크게 줄었다. 초초에서 정초로 가면서 상당한 필삭이 이뤄졌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뺄지는 편찬자들의 판단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고려가 개입할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개입한 사례들이 있다. 뒤에서 다룰 수정실록·개수실록 문제가 그것이다.
다만 원칙은 직서주의(直書主義)였다.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이다. 사초를 임의로 도려내거나 긁어내거나 먹으로 지운 사람은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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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을 적게 했다**
흥미로운 제도가 하나 있다.
조선 초기부터 사초에는 그것을 쓴 사관의 이름을 적게 했다. 자기가 쓴 것에 책임을 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제도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름이 남으면 뒷날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사관이 붓을 굽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종 때 한동안 이름을 적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명종 때 그 폐단이 다시 논의된 뒤 이름 기입이 규칙으로 굳어졌다.
익명으로 자유롭게 쓸 것인가, 실명으로 책임 있게 쓸 것인가. 조선의 관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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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렸나**
실록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경우에 따라 달랐다. 짧으면 1~2년, 길면 10년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분량이 많은 실록일수록 오래 걸렸고,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면 중단됐다가 재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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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인 이름들**
대부분은 「○○실록」이라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는 실록이 아니라 일기(日記)라 부른다. 두 왕이 폐위됐기 때문이다.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실록도 아니라는 논리다.
내용상으로는 실록과 같은 방식으로 편찬됐고,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에 포함해 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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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절차**
정초가 완성되고 인쇄가 끝나면,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다.
그때까지 사용한 모든 자료를 없애는 일이다.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