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붕당 싸움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아 왕이 된 사람이다. 자신을 지지한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고, 즉위 후에는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란까지 겪었다. 붕당의 폐해를 몸으로 겪은 왕이었다.
그가 내놓은 답이 탕평이다.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에서 따온 말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인사에서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했다.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했고(1741), 이조전랑의 자천권도 혁파했다.
민생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균역법으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였고, 청계천을 준설했으며, 신문고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탕평의 방식을 두고 조정 안에서 논쟁이 있었다. 크게 두 갈래였다.
결과
영조는 완론탕평을 택했고 52년을 다스렸다. 조선 역사상 가장 긴 재위였다. 붕당 간의 물리적 충돌은 확실히 줄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표면의 균형 아래에서 노론은 여전히 우세했고, 시비를 덮은 대가는 다음 세대에 청구됐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사도세자 문제로 옮겨붙으면서, 영조는 자기 아들을 죽이는 데 이르게 된다.
탕평에 대한 학계의 평가도 갈린다.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이룬 적극적 개혁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붕당의 시비를 미봉한 채 왕 개인의 조정 능력에 의존한 한시적 안정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후자의 근거는 명확하다. 정조 사후 탕평이 무너지자마자 세도정치가 왔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극심한 대립 뒤에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 원칙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일단 갈등을 봉합하고 국정을 돌아가게 할 것인가.
전자는 정의롭지만 갈등을 연장한다. 후자는 실용적이지만 문제를 미룬다. 그리고 미뤄진 문제는 대개 더 나쁜 형태로 돌아온다.
오늘의 거울
통합과 청산 중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다.
영조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봉합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시비를 덮어 얻은 안정은 그 시비가 다시 터질 때까지만 지속된다. 영조에게 그 기한은 37년이었고, 청구서는 아들의 목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