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쟁 — 승리가 만든 감옥

1967 6월 5일 · 예루살렘 · 서안 · 가자 · 시나이 · 골란

1967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공군기지들을 선제 타격하면서 3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주간 고조되던 위기 — 이집트의 시나이 병력 증강, 유엔 완충군 철수 요구, 티란 해협 봉쇄 — 끝의 개전이었다. 전쟁은 엿새 만에 끝났고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요르단강 서안지구)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통곡의 벽이 있는 예루살렘 구시가에 이스라엘군이 들어선 순간은 유대 민족사의 감격으로 기록되었다 —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이스라엘은 자국 시민이 아닌 100만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군정으로 통치하는 점령국이 되었다.

1967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는 "최근 분쟁에서 점령한 영토들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와 "역내 모든 국가의 안전한 경계 내 생존권 인정"을 맞교환하는 원칙 —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 — 을 제시했고, 이후 모든 평화 협상의 기초 문서가 된다. 그러나 결의의 영문본에 정관사가 없다는 것("withdrawal from territories" — 모든 점령지인가, 일부인가)을 두고 해석은 갈렸고, 철수는 시나이(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이후 단계적 반환)를 제외하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령지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보 거점의 논리로, 이후에는 "약속의 땅 전체"를 말하는 종교적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 국제사회 다수와 유엔은 점령지 정착촌을 제네바 4협약 위반으로 보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다투어 왔다. 정착민은 1972년 1만 명 수준에서 오늘날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70만 명 규모로 늘었다.

1967년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분기점이기도 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되찾아 주리라는 기대가 엿새 만에 무너지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의 조직으로 눈을 돌렸다 — 아라파트의 파타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주도권을 잡았고, PLO는 무장투쟁과 국제 외교를 오가며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이름을 세계 정치의 무대에 다시 올려놓았다. 1973년 이집트·시리아의 기습으로 시작된 욤키푸르 전쟁, 그로 인한 1차 오일쇼크 — 한국 경제가 처음으로 중동발 충격을 정면으로 맞은 사건 — 를 거쳐,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집트가 아랍국 중 처음 이스라엘과 단독 강화하면서, 문제는 "아랍 대 이스라엘"의 국가 간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로 좁혀져 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1967년의 선 — 그린라인 — 은 두 국가 해법 논의의 기준선이고, 그해 시작된 점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군사 점령이다. 6일의 승리가 만든 구도가 60년째 풀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승리한 쪽에는 "안보를 위해 놓을 수 없는 땅"이, 패배한 쪽에는 "돌려받지 못한 삶"이 남았고, 이 두 문장은 이후 모든 협상 테이블 위에 함께 놓이게 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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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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