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호 결의 — 남의 손으로 그어진 선

1947 11월 29일 · 미국 뉴욕 레이크석세스 유엔 총회

2차 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의 손을 떠났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유럽의 수용소에서 팔레스타인행 배에 오르는 동안, 유대 무장조직들은 영국 통치기구를 공격했고(1946년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로 91명 사망), 재정과 명분이 바닥난 영국은 1947년 2월 문제를 신생 유엔에 넘겨버렸다. 유엔 특별위원회(UNSCOP)가 파견되었고 — 위원 11개국 중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의견을 대변할 아랍 국가는 없었다 — 다수안으로 분할을 권고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결의 181호를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으로 가결했다.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면적의 약 56%)와 아랍국가(약 43%)로 나누고 예루살렘은 국제관리 아래 두는 안이었다. 당시 유대인은 인구의 약 3분의 1, 소유 토지는 약 7%였으므로, 아랍 측이 보기에 이 분할은 산술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 왜 다수 주민의 다수 토지 위에 이주해 온 소수의 국가가 더 넓게 그어지는가.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부는 총회 표결 자체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안을 거부했다. 유대 측 지도부는 국제적 승인이라는 결정적 이득 앞에서, 영토에 대한 불만을 접고 안을 수락했다.

표결의 뒷면도 기록해 둔다. 미국과 소련이 드물게 같은 편에 서서 찬성을 이끌었고, 표결 연기와 회유 속에 몇몇 소국의 표가 바뀌었다. 홀로코스트 직후의 세계에서 유대 국가 수립에 반대하기란 도덕적으로 쉽지 않았다 — 그러나 유럽이 저지른 범죄의 청구서가 유럽이 아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돌아왔다는 항변 또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다. 표결 다음 날부터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두 공동체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를 떠올리지 않기 어렵다. 바로 그 1947년 가을, 유엔 총회는 한반도 문제도 다루고 있었다 —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조선의 장래 역시 당사자의 손을 떠나 유엔 표결에 부쳐졌고, 이듬해 1948년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다. 팔레스타인과 한반도는 같은 몇 달 사이에, 같은 회의장에서, 당사자 아닌 손들에 의해 선이 그어진 땅이었다. 물론 이후의 경로는 다르다 — 그러나 "분할을 결정한 자리에 분할당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출발점만은 정확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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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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