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 한쪽의 독립, 다른 쪽의 나크바

1948 5월 14일 · 텔아비브 · 팔레스타인 전역

1948년 5월 14일 오후, 영국 위임통치가 끝나는 날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2천 년 가까운 이산(디아스포라)과 홀로코스트의 잿더미 끝에 세워진 국가 — 유대 민족의 서사에서 이날은 기적의 날이다. 선언 몇 시간 뒤 이집트·요르단·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진입하며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고, 신생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분할안의 56%보다 넓은 78%의 땅을 확보한 채 1949년 휴전선(그린라인)을 그었다.

같은 시간, 같은 땅의 다른 쪽에서는 한 사회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1947년 말 내전 단계부터 1949년 휴전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 70만 명 안팎 — 당시 아랍 인구의 절반이 넘는 — 이 고향에서 떠나거나 쫓겨났고, 400개가 넘는 마을이 비워지거나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것을 나크바(النكبة, 대재앙)라 부른다. 1948년 4월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유대 우파 무장조직이 주민 10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은 공포를 확산시켜 피란을 가속했고, 리다와 람레에서는 이스라엘군의 명령으로 수만 명이 한여름에 걸어서 추방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난민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고, 비워진 마을과 토지는 부재자재산법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다. 유엔 총회 결의 194호(1948.12)는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난민의 귀환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허용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행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난민이 왜 발생했는가를 두고 역사 서술은 오래 다투어 왔다. 이스라엘의 전통 서사는 "아랍 지도부의 소개 지시와 전쟁의 혼란"을 말해 왔고, 팔레스타인 서사는 "계획적 추방"을 말해 왔다. 1980년대 이후 이스라엘 문서고가 열리면서 베니 모리스 등 이스라엘 "신사학자"들이 재구성한 그림은 그 사이 어딘가다 — 전쟁의 공포로 인한 피란, 개별 지휘관의 추방 명령, 학살 소문의 연쇄 효과,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게 한 전후 결정이 겹쳐진 결과라는 것이다. 다만 "추방이 사전에 수립된 마스터플랜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모리스(아니다)와 일란 파페(그렇다) 같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갈린다. 확실한 것은 결과다 — 한 민족의 국가가 세워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른 민족은 나라 없는 난민이 되었다.

덧붙여 기록해 둘 것이 있다. 1948년 이후 십수 년에 걸쳐 이라크·이집트·예멘·모로코 등 아랍 세계의 오랜 유대인 공동체들에서도 85만 명 안팎이 재산을 잃고 떠나야 했고, 그 다수가 이스라엘로 향했다 —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의 절반가량이 이들 미즈라힘의 후손이다. 즉 1948년을 전후한 몇 해는 두 방향의 뿌리 뽑힘이 일어난 시간이었다. 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한반도의 우리는, "건국"과 "상실"이 한 문장 안에 있는 해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독자일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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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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