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혁명에서 이슬람 혁명까지 — 왕정이 무너지기까지의 16년

1979 2월 11일 · 이란 테헤란

1953년 이후 팔라비 국왕은 미국의 지원 아래 권력을 굳혔다. 1963년부터는 "백색혁명"이라 불린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밀어붙였다 — 토지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여성 참정권, 문맹 퇴치. 성과가 없지 않았으나 방식은 일방적이었고, 토지를 잃은 지주층과 종교계, 그리고 개혁의 과실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이 동시에 등을 돌렸다.

1963년 백색혁명 국민투표에 반대하며 국왕을 정면으로 규탄한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때 전국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체포와 석방을 거쳐 1964년 미군 지위 관련 협정 — 미군과 그 관계자에게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인정하는 내용 — 에 항의하다 국외로 추방되었다. 튀르키예와 이라크 나자프, 마지막에는 파리에서 15년 가까이 망명 생활을 하며 그는 자신의 통치 이론을 정리했고,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설교가 이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국왕의 통치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의 감시와 고문에 기대고 있었고, 오일 붐이 만든 급격한 빈부 격차가 불만을 키웠다. 1978년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이슬람 세력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 좌파, 자유주의자, 학생, 상인 계층이 함께했다. 1979년 1월 국왕이 "요양"을 명분으로 출국했고, 2월 1일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테헤란 거리를 메운 인파는 수백만으로 추산된다. 2월 11일 군이 중립을 선언하며 왕정은 끝났다.

혁명 이후의 전개는 함께 싸운 세력들의 기대와 갈라졌다. 4월 국민투표로 이슬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최고지도자가 선출 권력 위에 서는 체제가 헌법에 담겼다. 혁명에 참여했던 좌파와 자유주의 계열, 그리고 여성 운동은 이후 강도 높은 탄압을 받았다. 하나의 억압이 다른 억압으로 대체되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이 혁명은 한국 경제를 직접 흔들었다. 이란의 원유 생산이 급감하며 1978~1980년 2차 오일쇼크가 왔고, 이는 유신 말기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침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의 혁명이 한국의 물가와 성장률에 곧바로 나타난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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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란 현대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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