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자, 이란 정계에서 석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중심에 법학 박사 출신의 노정객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있었다. 1882년 고위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1905년 입헌혁명 이후 의회 정치의 한복판에서 정치 인생을 보낸 인물이었다. 그가 이끄는 국민전선의 요구는 단순했다 —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 옛 APOC)의 장부를 열어보게 하고, 계약대로 받아야 할 몫을 받자는 것이었다.
회사가 감사를 거부하자 의회는 더 나아갔다. 1951년 4월 28일 이란 의회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의결했고, 며칠 뒤 모사데크가 총리에 취임했다. 1901년 이후 반세기 만에 이란이 자국 석유의 주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테헤란 거리는 환호했다. 이란 밖에서도, 식민 지배에서 막 벗어나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이 이 소식을 주목했다.
그러나 국유화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영국 기술 인력이 철수하면서 정유시설 운영 능력이 떨어졌고, 영국은 해군력을 동원해 이란산 원유의 국제 판로를 사실상 봉쇄했다. 이란 경제는 급격히 나빠졌다. 고립을 벗어나려 모사데크가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자, 이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쪽에 좋은 빌미가 되었다.
모사데크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자원 주권을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민족주의 지도자로 보는 시각이 있는 한편, 봉쇄에 대한 대비 없이 국유화를 밀어붙였고 후반에는 의회를 우회하는 통치로 스스로 지지 기반을 좁혔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그가 선거로 선출된 총리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무너뜨린 것이 이란 내부의 표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다투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