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4일, 이란 학생 시위대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외교관과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직접적 계기는 망명한 팔라비 전 국왕이 암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입국한 일이었다. 점거자들의 요구는 국왕의 신병 인도였다. 그 밑에는 1953년의 기억이 있었다 — 미국이 국왕을 다시 앉히려 한다는 의심이 이란 사회에 실재했고, 26년 전의 전례가 그 의심에 근거를 제공했다.
인질 52명의 억류는 444일간 이어졌다. 미국은 1980년 4월 군사 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사막에서 헬기 사고로 미군 8명이 숨지며 실패했다. 이 실패는 카터 대통령의 재선 실패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 쪽에서도 사태를 끝낼 유인이 커졌고, 알제리 중재로 미국이 동결했던 이란 자산을 반환하기로 하면서 1981년 1월 20일 인질 전원이 풀려났다.
외교 공관의 불가침은 국제법의 오랜 원칙이며, 국제사법재판소는 1980년 이란의 행위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이 점에서 인질 사건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동시에 이 사건이 왜 이란 안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는지를 설명하려면 1953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는 양립한다 — 원인을 이해하는 일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은 다르다.
결과는 길었다. 미국과 이란의 국교는 이때 끊어져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40여 년의 제재와 대립은 모두 이 단절 위에서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