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 — 탁록의 10년 전쟁, 그리고 정반대로 기록된 승패

-2707 · 탁록 (허베이성 줘루현)

배달국 제14대 환웅의 이름은 자오지(慈烏支) — 세상은 그를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부른다.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을 뒤덮었던 붉은 악마의 도깨비 문양이 바로 이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니, 환단고기의 등장인물 가운데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환단고기가 기록하는 치우의 핵심은 기술이다. 그는 갈로산에서 구리와 쇠를 캐어 투구·갑옷·칼·창을 만들었다고 한다 — 기록을 따르자면 동아시아 최초의 금속 무기 개발자다. 주변이 아직 돌도끼와 나무창의 시대였다면, 금속으로 무장한 군대는 그 자체로 공포였을 것이다. 중국 사서가 치우를 "구리 머리에 쇠 이마(銅頭鐵額)"의 괴물로 묘사한 것을, 이 계통의 해석은 청동 투구와 철제 면갑을 쓴 장수의 모습이 적군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라 푼다. 무기만이 아니다. 치우는 병법을 창시하고, 81명의 형제(부족장 혹은 지휘관으로 해석된다)에게 부대를 나누어 맡겨 창병·궁병·기병으로 병종을 분화시켰으며, 북과 나팔과 깃발로 신호 체계를 만들어 전군이 한 몸처럼 움직이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안개를 일으켜 적을 혼란시켰다는 대목은 기상을 이용한 전술 혹은 연막전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 상대가 황제 헌원(軒轅)이다. 중국이 문명의 시조로 받드는 바로 그 황제다. 환단고기는 기원전 27세기 무렵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두 세력이 충돌해 10년에 걸쳐 73회를 싸웠고, 치우가 한 번도 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헌원이 신하의 예를 갖추어 복종했다고 기록한다. 전쟁 후 치우는 천하를 아홉 주로 나누어 다스리고 형법을 세우고 악기를 만들었다고 이어진다. 여기서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 작업 하나를 하자.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는 같은 전쟁을 정반대로 기록한다 — 황제가 탁록의 들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승자와 패자가 완전히 뒤집혀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양쪽 다 동의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탁록이라는 곳에서 치우와 황제가 싸웠다는 것, 그리고 치우가 실존을 의심하기 어려운 강렬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제3의 기록이 있다 — 「사기」 봉선서와 고조본기에 따르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아니라 중국 정사의 기록이다. 승리의 신으로 모셔진 것은 황제가 아니라 치우였던 셈이다. "패배해 처형당한 자에게 전쟁의 신 제사를 올렸겠는가"라는 것이 옹호론의 오래된 논거다. 「관자」에 치우가 천하를 다스렸다는 취지의 구절이 있다는 점도 함께 거론된다. 치우의 사후 흔적은 국경을 넘는다. 중국 역대 왕조는 치우를 병주(兵主), 전쟁의 신으로 제사했고, 중국 남방의 묘족(먀오족)은 지금도 치우를 자신들의 시조로 받든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중국은 황제·염제·치우를 함께 모시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탁록에 세워 치우를 중화민족의 세 시조 중 하나로 편입시켰다 — 한국 재야 사학이 "우리 조상"이라 부르는 인물을 중국이 "중화의 조상"으로 흡수하는, 기묘한 역사 쟁탈전이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 쟁탈전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 고대의 인물을 근대의 민족 개념으로 소급해 소유권을 다투는 일의 아이러니 — 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한 가지만 미리 적어두자.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이냐 중국인의 조상이냐를 묻기 전에, 기원전 27세기에는 한국인도 중국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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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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