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① 비를 다시 만나기까지 — 1,200년의 침묵과 1883년의 탁본

1880 · 중국 지린성 지안 태왕진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무덤 곁에 높이 6.39m의 거대한 응회암 비를 세웠다. 네 면에 예서로 1,775자를 새겼고, 그 가운데 150자 남짓은 지금 판독이 어렵다. 고구려 멸망 뒤 이 비는 사실상 잊혔다. 조선 전기 문헌에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언급이 간혹 보이지만, 비문을 실제로 읽은 기록은 없다. 조선 후기까지 이 비는 대체로 금나라 황제의 비로 알려져 있었다.

잊힘에는 이유가 있었다. 청은 만주를 자기 발상지로 보아 봉금(封禁), 곧 거주 금지 조치를 시행했고 통구 일대의 인적은 끊겼다. 봉금이 풀리고 회인현이 설치된 1880년 무렵에야 비는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재발견의 정확한 경위는 지금도 불분명한 점이 많다. 소식이 알려지자 회인현 지현 장월이 관월산을 보내 탁본을 뜨게 했고, 이어 중국의 서예가와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비문이 근대 학계에 처음 소개된 통로가 학자가 아니라 군대였다. 1883년, 만주에서 정보 활동을 하던 일본 육군 포병 중위 사코 가게노부(酒匂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글자 윤곽을 종이에 베껴 그린 뒤 바깥을 먹으로 칠해 탁본처럼 만든 사본 — 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사본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육군 참모본부가 몇 해 동안 비공개로 해독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가 1889년 아세아협회 기관지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의 논고 등으로 실리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순서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고구려가 새긴 비를, 청이 봉금으로 덮어두었고, 일본군 정보장교가 사본을 반출했으며, 일본군 참모본부가 먼저 읽었고, 그 해독이 학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비문을 둘러싼 이후 100여 년의 논쟁은 이 출발선에서 이미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 이 시리즈가 비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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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광개토대왕릉비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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