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 중간지대가 사라질 때 함께 지워진 이름

1947 7월 19일 · 서울 혜화동

몽양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 3·1운동의 도화선 가운데 하나가 된 외교전이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국내로 압송돼 복역한 뒤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서 1936년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가 신문 문을 닫았다. 일제 패망을 내다보고 1944년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조직했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마주 앉아 치안권 이양을 교섭했고,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워 해방 정국의 첫 질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건준도, 뒤이은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그는 1946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꾸려 분단을 막을 마지막 다리를 놓으려 했다 — 그 대가는 양쪽 모두의 증오였다. 우익에게는 공산주의자로, 좌익에게는 기회주의자로 몰리며 열 차례가 넘는 테러를 당했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열아홉 살 청년의 총에 숨졌다.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에는 수십만 인파가 몰렸지만, 분단이 굳어진 뒤 그의 이름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온전히 기념되지 못했다 — 중간지대에 섰던 사람은 어느 쪽의 역사에도 주인공으로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사후 58년 만인 2005년이었고, 등급이 낮다는 유족과 학계의 문제 제기 끝에 2008년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다시 추서됐다. 훈장의 등급을 두 번 매겨야 했던 그 머뭇거림 자체가, 이 이름을 어디에 둘지 한국 사회가 오래 정하지 못했다는 기록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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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워진 이름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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