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봉 — 남과 북이 함께 기렸기에, 오히려 잊혔다

1934 9월 19일 · 환인현 소황구

양세봉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본명 양서봉, 호 벽해). 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채 남의 땅을 부치다 1917년 무렵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이주했고, 3·1운동 이후 평북 삭주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광복군총영과 참의부·정의부를 거치며 소대장에서 중대장으로 성장한 그는, 1929년 만주 독립운동 세력이 국민부로 통합되고 그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이 창설되자 핵심 지휘관이 됐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그해 겨울 신빈사건으로 지도부가 무너지자,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맡아 붕괴 직전의 부대를 다시 세웠다. 그가 택한 길은 한중 연합이었다 — 중국의용군과 손잡고 한중연합군을 편성해 1932년 봄 영릉가성을 탈환했고, 이듬해 흥경성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연구자들은 그가 총사령으로 싸운 5년간의 전투를 80여 차례로 추산한다. 사회주의 계열이 중국공산당 산하로 들어가고 민족주의 계열이 중국 관내로 떠난 뒤에도, 남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조선혁명군뿐이었다. 남만주 동포들은 소작농 출신의 이 사령관을 "군신"이라 불렀다. 그러나 승전은 일제의 제거 공작을 불렀다. 1934년 9월 19일 밤, 밀정 박창해는 혁명군을 후원하던 중국인을 매수해 한중 합작 논의를 구실로 양세봉을 환인현 소황구 골짜기로 유인했고, 수수밭 매복 속에서 피격된 그는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부대원들이 시신을 가매장하자 일제는 묘를 파헤쳐 목을 잘라 통화 시내에 효수했고, 조선혁명군은 끝내 사령관의 수급을 되찾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싸움의 기록이라면, 그 뒤는 지워짐의 기록이다. 양세봉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가까웠고 소년 김일성을 도운 인연이 있었다 — 해방 후 북한은 그의 부인과 아들을 평양으로 불러 예우했고, 1961년 유해를 평양 근교로 이장한 뒤 1986년 애국열사릉에 안치했다. 남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74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유해 없는 묘를 조성했다.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묘가 있는 인물은 양세봉이 유일하다. 그러나 냉전의 남한에서 "북한이 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훈장과 별개로 그의 이름을 교과서와 대중적 기억의 바깥으로 밀어냈고, 청산리·봉오동의 영웅들이 국민적 서사가 되는 동안 80여 차례를 싸운 남만주 최후의 사령관은 연구자들의 각주 속에 머물렀다. 좌우 어느 쪽도 아니었던 민족주의자가, 양쪽 모두의 기림을 받았다는 이유로 어느 쪽의 서사에도 온전히 담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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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워진 이름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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