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병자호란 때 피난 가던 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의 교육을 받고 자랐고, 대제학까지 올랐으며, 서인에 속했다.
숙종대의 환국정치 속에서 그의 삶은 유배와 복귀의 반복이었다. 1687년(숙종 13) 장희빈 일가와 관련한 언사 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탄핵돼 경상도 남해에 위리안치됐다. 그 사이 어머니 윤씨가 아들을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고,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692년 남해 노도(櫓島)에서 56세로 죽었다.
【구운몽 —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팔선녀를 만나 마음이 흔들린 죄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다. 양소유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팔선녀가 환생한 여덟 여인을 차례로 만나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러다 늙어 문득 깨어보니 모두 하룻밤 꿈이었다.
구조는 단순하다. 현실(불계) → 꿈(인간계) → 현실. 이런 구성을 환몽구조(幻夢構造)라 하며, 「조신설화」에서 이어져 조선 후기 몽자류(夢字類) 소설의 전형이 된다.
주제는 표면적으로 분명하다. 일체의 부귀영화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공(空) 사상이다. 다만 읽는 방식은 갈린다. 이재(李縡)는 이 작품이 불교적 내용을 담았지만 그 속에 자신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 곧 굴원 『초사』 「이소」의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보았다. 그렇게 읽으면 유배객의 심경이 투영된 작품이 된다.
창작 동기로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가 "김만중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 구운몽을 지었던 것처럼"이라 언급한 기록이 근거다.
【언제 어디서 썼나 — 논쟁과 해결】 집필 시기를 두고 오래 논쟁이 있었다. 선천 유배(1687)인지 남해 유배(1689)인지가 갈렸다.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 『서포연보(西浦年譜)』가 발견되면서 선천 유배 시기로 정리됐고, 완성은 남해 유배기로 추정된다. 다만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남해에서 썼다"는 설명이 통용된다.
원작이 국문인지 한문인지도 논쟁거리였다. 김태준은 「구운몽」도 「사씨남정기」처럼 김만중이 국문으로 짓고 김춘택이 한문으로 옮겼을 것이라 단정했다. 현전 이본은 1725년 금성판 한문 목판본을 비롯해 국문 방각본·필사본·활자본, 한문 필사본·현토본 등 50여 종이 넘는다.
【사씨남정기 — 목적이 있는 소설】 남해 유배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씨남정기」는 성격이 다르다. 목적성이 뚜렷하다.
중국을 배경으로, 유연수의 처 사씨가 첩 교씨의 모함으로 쫓겨났다가 결국 진실이 밝혀져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구도가 당시 조정 상황과 정확히 겹친다 —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은 기사환국이다.
즉 이 소설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정치적 발언이다. 직접 간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이야기로 임금을 깨우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설을 잡스러운 것으로 여기던 시대에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 국문소설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다.
【국문 문학 예찬론】 김만중이 문학사에서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론가로서다.
그는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우리말로 쓴 문학의 가치를 주장했다.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두고,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세 편뿐이라 평하며 그중 「속미인곡」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문으로 쓴 시는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는 취지의 비판도 남겼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고 불교 용어를 사용하는 등 사상적으로도 진보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363편의 시를 남겼고, 그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유배로 점철된 그의 생애와 무관하지 않다.
【그때 조선은】 숙종대(1674~1720)는 환국(換局)의 시대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밀려나고, 기사환국(1689)으로 서인이 밀려나고, 갑술환국(1694)으로 다시 뒤집힌다. 왕이 정국을 통째로 갈아엎는 방식으로 신하를 견제했다.
김만중의 유배와 죽음은 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그가 죽은 2년 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복권되고 인현왕후가 돌아왔으며, 그도 관작을 회복했다.
남해 노도는 남해섬에서도 배를 타고 1킬로미터를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남해를 "한양에서 천사십오 리"라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온종일 바다만 바라보던 그를 "노자묵자할배"라 불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