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1585 · 관동 8백리 / 창평(담양)

정철(鄭澈, 1536~1593)은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로 꼽힌다.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네 편이 그의 대표작이다.

생애는 정치 그 자체였다. 서인의 영수로 당쟁의 한복판에 있었고, 정여립 사건(1589) 때 위관을 맡아 동인을 대거 처벌한 기축옥사의 책임자로 지목된다. 그리고 스스로도 여러 차례 탄핵당해 낙향하고 유배됐다.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그 밀려난 시간에 쓰였다.

【관동별곡 — 여행이 문학이 되다】 1580년(선조 13)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때 관동 8백 리를 다니며 지은 것이 「관동별곡」이다.

구조는 여정을 따른다. 한양을 떠나 원주에 이르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만폭동·진헐대·개심대·비로봉을 거치고, 동해로 나가 총석정·삼일포·의상대에서 해돋이를 보고, 마지막에 술에 취해 꿈속에서 신선을 만난다.

금강산 묘사가 특히 유명하다. 산봉우리들을 두고 "조물주가 재주를 부린 것인가"라 묻고, 비로봉에 올라 공자가 태산에 올랐던 일을 떠올린다. 개심대에서는 산봉우리 하나하나가 사람 같다며, 저 기운을 흩어 인걸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화려한 유람기에는 다른 층이 섞여 있다. 곳곳에서 임금을 향한 마음이 튀어나온다. 서울 쪽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신선이 되고 싶다면서도 백성을 생각한다. 관찰사의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신하의 보고서인 셈이다.

【사미인곡·속미인곡 — 임금을 여인의 목소리로】 1585년 정철은 탄핵을 받아 고향 창평(전남 담양)으로 물러난다. 그곳에서 4년을 지내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썼다.

두 작품의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임과 헤어져 그리워하는 여인의 목소리로 임금을 향한 충정을 노래한다. 이런 방식을 연군가사(戀君歌辭)라 한다.

「사미인곡」은 사계절의 흐름을 따라간다. 봄에는 매화를 꺾어 임께 보내고 싶고, 여름에는 옷을 지어 보내고 싶고, 가을에는 달빛을 보내고 싶고, 겨울에는 따뜻한 볕을 보내고 싶다. 계절마다 무언가를 보내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차라리 죽어 범나비가 되어 임의 옷에 앉겠다고 한다.

「속미인곡」은 형식이 다르다. 두 여인이 대화한다. 한 여인이 왜 그리 슬퍼하느냐 묻고, 다른 여인이 사연을 털어놓는 구조다. 우리말 사용이 특히 뛰어나 한자어가 적고 대화체가 자연스럽다. 그래서 두 작품 가운데 「속미인곡」을 문학적으로 더 높이 치는 견해가 많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정철의 세 작품을 두고 우리말로 쓴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장이라 평하며, 그중에서도 「속미인곡」을 으뜸으로 꼽았다.

【평가의 두 얼굴】 정철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문학적으로는 이견이 적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끌어낸 작가로 평가되며, 특히 4음보 가사 형식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가 확고하다. 김만중의 극찬이 대표적이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크다. 기축옥사에서 그가 맡은 역할 때문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처리하며 동인 1천여 명이 화를 입었다고 전하는데, 그 규모와 정철의 책임 정도를 두고 견해가 갈린다. 서인 측 기록과 동인 측 기록이 크게 다르고, 현대 학계에서도 정철 주도설과 선조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설이 대립한다.

연군가사를 읽을 때 이 점을 함께 두면 작품이 다르게 보인다. 여인의 목소리로 임금을 그리는 그 절절함은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복귀를 위한 정치적 언어였을 수도 있다. 둘 다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형식이 남긴 것】 정철에 이르러 가사는 형식적 완성에 도달한다. 4음 4보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마지막 구를 시조 종장 형식으로 마감하는 구조가 전형으로 굳는다.

내용상으로도 갈래가 분화한다. 자연을 노래하는 강호가사(성산별곡), 여행을 기록하는 기행가사(관동별곡), 임금을 그리는 연군가사(사미인곡·속미인곡)가 모두 그의 손에서 대표작을 얻었다.

특히 연군가사의 여성 화자 설정은 오래 이어진다. 남성 사대부가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충정을 말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 유배가사로 계승된다. 「정읍사」에서 시작해 「가시리」·「동동」을 거쳐온 기다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여기서는 정치적 언어로 전용된 셈이다.

【그때 조선은】 선조대는 당쟁이 본격화된 시기다. 1575년 동서분당 이후 사림이 갈라져 대립했고, 정철은 서인의 중심에 있었다.

「관동별곡」이 쓰인 1580년은 그가 잠시 복귀했던 시기이고, 「사미인곡」이 쓰인 창평 시절은 밀려난 시기다. 그리고 1589년 기축옥사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섰다가, 1591년 광해군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1593년 강화에서 죽었다.

관동 8백 리를 유람하며 신선을 꿈꾸던 그 마음과, 옥사의 위관으로 앉아 있던 그 자리가 한 사람 안에 있었다. 조선 사대부 문학의 절정이 당쟁의 한복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 시대 문학을 읽는 하나의 열쇠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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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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