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다섯 살에 세종 앞에서 글을 지어 오세(五歲)라는 별명을 얻은 신동이었다. 입신양명이 보장된 삶이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이듬해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읽던 책을 불태우고 승려가 되어 방랑길에 올랐다. 이후 평생 벼슬하지 않았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금오신화 — 소설의 시작】 전국을 떠돌던 그는 1462년 경주 금오산에 터를 잡고, 1465년부터 금오산실에 은거하며 글을 썼다. 그때 지은 것이 『금오신화(金鰲新話)』다.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는 뜻이다.
현재 다섯 편이 전한다. 「만복사저포기」(남원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로 부처와 내기해 죽은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 「이생규장전」(담 너머로 만난 연인이 홍건적의 난에 죽고 귀신이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 「취유부벽정기」(평양 부벽루에서 기자조선 왕녀의 혼을 만나는 이야기), 「남염부주지」(저승 염라대왕과 사상을 논하는 이야기), 「용궁부연록」(용궁에 초대받아 글을 짓는 이야기)이다.
하권 끝에 이 책을 갑집(甲集)이라 적은 기록이 있어, 본래는 다섯 편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처음인가】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꼽힌다. 전기체(傳奇體) 소설, 곧 용궁·저승·신선 세계처럼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소재로 쓴 소설의 효시다.
다만 정확히 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무(無)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말여초 문헌에서부터 전기(傳奇) 또는 전기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보이며, 그 서사문학적 전통 위에서 나왔다. 또 중국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널리 인정된다. 실제로 「이생규장전」과 『전등신화』의 「취취전」은 서로 대응되는 작품으로 지적된다.
소설이라는 갈래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그럼에도 한국 소설의 출발점을 이루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방외인 문학】 『금오신화』를 읽는 열쇠는 김시습의 처지다.
다섯 편 모두 주인공이 현실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저승이나 용궁 같은 이계(異界)에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 만남은 반드시 끝난다. 여인은 사라지고 주인공은 홀로 남는다. 「이생규장전」은 아내가 떠난 뒤 이생도 병들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문학으로 푼 것으로 읽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체제 바깥에 선 사람의 문학이라는 뜻에서 방외인(方外人) 문학이라 부른다.
특히 「남염부주지」는 주인공이 염라대왕과 유교·불교·귀신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어서, 김시습 자신의 사상을 직접 담은 작품으로 읽힌다. 승려의 옷을 입었으나 유학자의 문제의식을 놓지 않은 그의 이중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전해진 경로】 이 책이 남은 과정도 흥미롭다.
현전 목판본은 1653년(효종 4) 일본에서 초간된 것을 재간한 것이다. 초간의 대본은 일본 오쓰카 가문에 오래 전하던 자료였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던 것이 일본에서 돌아온 셈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동경판이 소장돼 있다.
1952년에는 국내에서도 정병욱에 의해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의 필사본이 발견됐다.
창작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30대에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은거하며 지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때 조선은】 김시습의 생애는 조선 전기 정치사와 정확히 겹친다. 계유정난(1453), 단종 폐위(1455), 사육신 사건(1456)이 그의 20대 초반에 일어났다.
앞서 조선 전기 시리즈에서 본 정극인도 같은 시기에 벼슬을 버리고 태인으로 내려가 「상춘곡」을 썼다. 다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정극인은 향리에서 안빈낙도를 노래했고, 김시습은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며 이계(異界)의 이야기를 썼다.
같은 좌절이 하나는 강호가도로, 하나는 소설로 갔다. 조선 전기 문학의 두 갈래가 같은 사건에서 갈라져 나온 셈이다.
그는 1481년 잠시 환속해 제사를 지내고 재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다시 승려복을 입었다. 1493년 부여 무량사에서 『묘법연화경』 발문을 쓴 뒤 병으로 죽었다. 백 년 뒤 내 무덤에 무얼 적으려거든 꿈꾸다가 죽은 늙은이라 하라는 시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