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악지는 이 노래의 유래를 이렇게 적었다. 정읍(井邑) 사람이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산 바위 위에 올라 남편이 올 길을 바라보며, 그가 밤길을 걷다가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진흙탕물의 더러움에 빗대어 노래를 지었다. 그 곡을 「정읍(井邑)」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인다 — 망부석(望夫石)은 정읍현 북쪽 10리에 있고, 후세에 전해오는 고개의 망부석 발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악학궤범』 권5에 실린 원문은 이렇다.
(前腔)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後腔) 全져재 녀러신고요 / 어긔야 즌ᄃᆡ를 드ᄃᆡ욜셰라 / 어긔야 어강됴리 (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ᄃᆡ 점그ᄅᆞᆯ셰라 / 어긔야 어강됴리 (小葉) 아으 다롱디리
박병채의 현대어 풀이를 따르면 대략 이렇게 된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 시장에 가 계신가요 / 진 곳을 디딜세라 /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두 개의 최초】 이 노래의 가치는 두 겹이다.
첫째, 가사가 전하는 유일한 백제 문학이다. 백제는 나라가 망하며 기록이 흩어져 문학다운 문학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정읍사」 한 편만이 살아남았다.
둘째, 한글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다. 백제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가 천 년 가까이 구전되다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1493)에 우리 글자로 기록됐다. 「공무도하가」·「황조가」·「구지가」가 모두 한문 번역으로만 남은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다만 이 두 번째 특징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원래 소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대신, 15세기 표기로 적힌 고대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통째로 남았다. 실제로 「정읍사」는 상고시가 네 편 가운데 어석(語釋) 논쟁이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이다.
【첫 번째 쟁점 — 정말 백제 노래인가】 이 노래의 국적, 정확히는 시대 소속을 두고 세 갈래 견해가 대립한다.
① 백제가요설(통설) — 『고려사』 권71 악지2가 이 노래를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백제 속악으로 분류해 실었다는 것이 근거다. 『삼국사기』 악지와 『고려사』 악지가 재래속악을 편성한 방식이 같은데, 그 안에서 「정읍사」를 고려속악과 구별해 삼국속악조에 넣은 것은 편찬자의 착오가 아니라 의도적 분류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다.
② 통일신라 이후설 — 가사 중 全져재의 全(전)을 전주(全州)로 읽는 데서 출발한다. 백제의 완산주(完山州)가 전주로 개명된 것은 신라 경덕왕 15년(756년, 『동국여지승람』 권32 전주부)이므로, 그렇다면 이 노래는 백제가 아니라 경덕왕 이후 또는 고려시대 옛 백제 지방의 민요가 된다.
③ 고려 충렬왕대설 — 가장 급진적이다. 『고려사』 악지의 삼국속악조 분류 자체를 편찬자의 잘못으로 돌리고, 같은 책 고려속악조에 무고정재(舞鼓呈才) 때 「정읍사」를 불렀다는 기록에 주목해 「정읍사」를 「무고」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무고」를 만든 이곤(李混)의 생존 연대에 맞춰, 이 노래가 고려 충렬왕 무렵 개성 주변에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
③에 대한 반박은 이렇다. 고려속악조에 들어 있다 하여 모두 고려 가요일 수는 없듯, 무고정재 때 「정읍사」를 불렀다 하여 제작연대가 이곤의 생존 연대와 같을 수는 없다. 이는 재래속악, 곧 유전악(遺傳樂)인 「정읍사」를 이곤이 지은 무고라는 악곡에 얹어 불렀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백제가요로 인정하더라도, 오랜 세월 고려속요와 함께 불리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 성격으로 변모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두 번째 쟁점 — 全은 어디에 붙는가】 이 한 글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고전시가 어석 논쟁의 전형이다.
문제의 발단은 후렴의 불균형이다. 제1·3연에 해당하는 전강과 과편에는 후렴이 2구씩 있는데, 제2연에 해당하는 후강에는 "어긔야 어강됴리" 1구뿐이고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없다.
이를 설명하려는 한 가설이 후강전(後腔全)설이다. 후강이라는 악조명 다음에 全자를 붙여, 후강에는 소엽이 없는 것이 온전(全)하다는 뜻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全은 악조명의 일부이고 가사 본문은 "져재"가 된다.
그러나 반론이 만만치 않다. 어느 문헌에도 후강전이라는 악조명이 보이지 않고, 음악적으로도 후강에 소엽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게다가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는 예외 없이 각 연마다 똑같은 후렴을 지니며, 후렴이란 본래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강의 소엽은 구전되는 동안 탈락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全자는 자동적으로 가사 본문 "져재" 앞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全져재로 읽더라도 해석이 또 갈린다. 종전에는 "전주 저자에"로만 풀었으나, "온 저자에"로 보는 새 견해도 제기됐다. 후자를 택하면 앞서 본 통일신라 이후설의 근거 하나가 무너진다. 全이 지명이 아니라 "온통"이라는 뜻의 우리말이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쟁점 — 즌ᄃᆡ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이 노래는 우리가 아는 것과 상당히 달라진다.
즌ᄃᆡ는 표면적으로 "진 곳", 곧 수렁물이 고인 진흙탕이다. 그러나 이 말의 상징적 의미를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의 비유로 푸는 것이 유력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즌ᄃᆡ를 드ᄃᆡ욜셰라"는 "진창을 밟으면 어쩌나"가 아니라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가 된다.
결정적 근거는 『고려사』 악지의 원문이다. "그 지아비가 밤에 다니다가 해를 범할까 두려워하여(恐其夫夜行犯害)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여기서 犯害를 어떻게 읽느냐가 갈림길이다. 종전에는 "밤길에 도둑의 침해를 입지 않을까"라는 피동으로 풀었으나, 犯은 본래 능동이다. 남편이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범하는" 것으로 읽어야 『고려사』 기록과 가사 내용이 일치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라는 구절 자체가, 이 노래가 직설이 아니라 비유로 지어졌음을 편찬자가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남편의 안전을 비는 노래가 아니라, 밤길에 다른 여자를 만날까 걱정하는 아내의 노래가 된다. 학교에서 배운 "달에게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순정한 아내"의 이미지와는 꽤 다른 그림이다.
소수 견해로는 즌ᄃᆡ를 인체 내 국부를 상징하는 은어로 보고, 드ᄃᆡ다를 육축(六畜)의 교미를 뜻하는 방언 "드딘다"와 관련지어 해석하려는 입장도 있다.
【네 번째 쟁점 — 마지막 연, 무엇이 저무는가】 결련(結聯)은 이설이 가장 많은 대목이다.
어느이다는 "어느 곳에다가", "어디에나", "어이다/어찌다(자칫하면)", "어느 누구에다", "어느 것에다" 등으로 갈리는데 "어느 것이나 다"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다만 그 "어느 것"이 행상인의 짐이나 재물이 아니라, 남편을 둘러싼 불안한 일이자 아내 자신을 휘감은 불안·의구·고뇌라고 보는 이설도 있다.
노코시라도 "마음을 놓으시리라", "놓고 계신가요", "놓으십시오", "놓고 계셨으면", 심지어 "놀고 계신가요"까지 갈린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비원(悲願)으로 본다면 "놓고 오시라"가 가장 순리적이라는 것이 한 정리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마지막 구다. 내가논ᄃᆡ는 문면대로면 "내가 가는 곳"인데, 문맥상 걱정의 대상은 남편이 오는 길이어야 하므로 어긋난다. 이를 해결하려고 부부일심동체설까지 동원됐고, "내 사람 가는 길"로 보는 견해, "내가 놀던 곳"으로 보는 이색적 해석도 나왔다. 상징으로 읽으면 "내 사랑 가는 곳", 곧 남편의 마음이 된다.
졈그ᄅᆞᆯ셰라는 "저물세라", "저물게 할세라", "잠길세라", "빠질세라"로 갈린다. 여기서 정교한 논증이 하나 있다. 저무는 것이 날(日)이라면 1연의 "달이 높이 돋아 멀리 비추소서"와 어긋나고, 달(月)이라면 애초에 "달이 저물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두워지는 것은 "나의 님", 곧 남편의 마음이라고 보아야 모든 모순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을 따르면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게 된다 — 다 놓아두고 오세요, 당신 마음이 어두워질까 두렵습니다. 밤길 걱정이 아니라 변심 걱정으로 끝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쟁점 — 궁중에서 쫓겨난 노래】 「정읍사」는 삼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무고(舞鼓)의 무의(舞儀) 때 가창됐다. 조선에서는 섣달 그믐밤 궁중에서 악귀를 쫓던 나례(儺禮) 뒤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됐다.
그러나 중종 13년(1518), 이 노래는 궁중에서 폐지된다. 이유는 음란하다는 것이었고, 대신 새로 만든 악장 「오관산(五冠山)」이 그 자리를 채웠다(『중종실록』 13년 4월조).
이 사건은 앞의 세 번째 쟁점과 정확히 맞물린다. 만약 「정읍사」가 단순히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노래였다면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지될 까닭이 없다.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이 노래에서 우리가 교과서로 배운 것과 다른 무언가를 읽고 있었던 셈이다. 즌ᄃᆡ를 주색으로 읽는 해석이 후대의 과잉 독해가 아닐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형식이 남긴 것】 음악 형식은 전강·후강·과편·금선조·소엽으로 되어 있고, 시 형식은 11행이다. 후렴을 뺀 기본 시행만 보면 3연 6구가 되며, 각 연의 음절수가 3음 또는 4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 때문에 시조의 3장 6구 형식의 근원을 「정읍사」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많다.
내용상으로도 계보가 이어진다. 떠난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공무도하가」에서 시작된 흐름을 잇고, 고려속요 「가시리」와 황진이의 시조를 거쳐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으로 이어진다. 박목월의 「달」과 이호우의 「달밤」에 그려진 밤 풍경도 이 노래의 후예로 지목된다.
【그때 백제는】 이 노래의 주인공은 왕도 귀족도 아니고 행상을 나간 장사꾼과 그 아내다. 짐을 지고 마을과 마을을 오가며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밤길을 걸어야 했으며, 남은 가족이 그 행방을 걱정했다는 것 — 여기에 기록에 잘 남지 않는 백제 서민의 삶이 담겨 있다.
백제는 중국·왜와 활발히 교역한 나라였고 내부적으로도 시장이 서고 물자가 오갔다. "져재(저자)"라는 단어가 노래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사회의 증거다. 백제 유일의 문학이 왕의 노래가 아니라 장사꾼 아내의 노래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되새길 만하다. 궁중에서 천 년을 불리다 음란하다는 이유로 쫓겨난 이력까지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