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왕조가 전하는 사연은 이렇다. 유리왕 3년(기원전 17) 겨울 10월, 왕비 송씨(松氏)가 죽었다. 왕은 두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았다. 하나는 골천(鶻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 다른 하나는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雉姬)였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화목하지 않자 왕은 양곡(凉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을 지어 따로 살게 했다.
뒤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이, 두 여자가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었다.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일 뿐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 치희는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쫓았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에 느껴 노래를 지었다.
翩翩黃鳥 — 펄펄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 —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 — 외로워라 이 내 몸은 誰其與歸 — 뉘와 함께 돌아갈까
【문학사에서의 자리】 이 네 줄이 갖는 위치는 비교적 분명하다. 앞선 「공무도하가」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제3자의 노래라면, 이것은 자기 감정을 자기가 노래한다. 게다가 짝지어 나는 새를 보고 혼자인 자신을 떠올리는 방식 — 자연물을 매개로 내면을 드러내는 이 수법은 이후 한국 서정시의 기본 문법이 된다. 집단의 노래에서 개인의 노래로 넘어가는 길목에 이 작품이 놓이는 이유다.
구조도 정교하다. 1·2구는 꾀꼬리(자연, 둘), 3·4구는 나(인간, 하나). 앞이 화합이면 뒤는 고독이고, 앞이 객관이면 뒤는 주관이다. 대조가 정확히 반으로 갈린다. 마지막 구를 의문형으로 닫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 답이 없는 물음이야말로 고독의 가장 정확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것이 논쟁이다】 문제는 이 작품에 대해 확정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창작 동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창작연대, 작자, 내용, 문학사적 위치가 모두 달라진다. 주요 견해를 정리하면 이렇다.
① 유리왕 서정시설(통설) —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리왕이 실연의 아픔을 꾀꼬리에 의탁해 표현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본다. 양주동 이래 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입장이다.
② 서사시설 — 이명선 등이 제기했다. 화희와 치희의 다툼을 두 종족 사이의 대립으로 읽는 것이다. 화희는 토착 골천 세력, 치희는 한나라계 이주 세력을 대표하며, 「황조가」는 유리왕이 이 대립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하고 부른 노래가 된다. 이 독법에서 작품은 개인의 실연이 아니라 통합에 실패한 군주의 정치적 좌절을 담은 서사시로 취급된다.
③ 신화적 인물설 — 유리왕 자체를 신화적 인물로 보는 입장이다. 신화적 인물은 창작적인 시를 지을 수 없으므로, 이 시가의 작자는 사실상 알 수 없고 제작연대도 확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④ 제의가요설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전하는 여러 제례의식 가운데, 남녀가 배우자를 선정하는 기회에 불린 사랑의 노래로 보는 견해다. 이 경우 「황조가」는 특정인의 창작이 아니라 집단의 노래가 된다.
⑤ 부족장 창작·오인 채록설 — 부족연맹국가 시대에 영고(迎鼓) 같은 계절제의나 수신제(隧神祭) 같은 성적 제의 때 한 부족장이 짓고 부른 노래인데, 영웅활동시대의 일반적 특징에 따라 영웅적 인물인 유리왕이 지은 것으로 오인되어 『삼국사기』에 채록됐다고 보는 견해다.
⑥ 민요 한역설 — 임동권은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민요를 가창했을 뿐이라고 보았다. 정병욱은 작자 불명의 고대가요가 한역되어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으로 보았고, 고정옥은 아예 후인의 위작으로 보았다.
【사료 자체의 균열】 이 논쟁들이 단순한 추측이 아닌 이유는, 『삼국사기』 기록 자체에 걸리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유리왕 3년의 사적(史蹟) 기록에 왕비 송씨의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배경설화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 정작 연대기에는 없는 것이다.
둘째, 당시 왕과 지배층의 혼인은 권력구조 편성과 결부되어 있었고, 두 아내를 동시에 두는 동시처제도(同時妻制度)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다. 화희와 치희가 나란히 계실이 되는 설정 자체가 당대 제도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셋째, 창작연대도 흔들린다. 『삼국사기』는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王嘗息樹下)"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일찍이(嘗)"는 유리왕 3년 이전을 가리키므로 이 노래는 3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온다. 그렇다면 기원전 17년이라는 연대 자체가 배경설화와 노래를 잇는 과정에서 생긴 것일 수 있다.
【화희와 치희 — 이름에 담긴 것】 가장 흥미로운 해석은 두 여인의 이름을 파고든 것이다. 화(禾)는 벼, 치(雉)는 꿩이다. 농경과 수렵을 각각 상징하는 글자다.
이 점에 주목한 견해는 두 여자의 다툼을 사회 경제의 전환으로 읽는다. 즉 「황조가」 설화는 수렵경제생활 상태에서 농경경제생활 상태로 전이되어 가던 과정을 신화적으로 투영한 것이며, 꿩(치희)이 부끄러워 떠나고 벼(화희)가 남는 결말은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의 시대가 오는 것을 뜻한다는 해석이다.
한편 이가원은 다른 각도에서 읽었다. 유리왕이 한족(漢族)의 문화에 도취되어 그를 수용하려다가 토착민인 골천인들의 총의에 따르지 못하고 좌절한 사건으로 본 것이다. 이 경우 치희의 이탈은 개인의 가출이 아니라 외래 문화 수용 시도의 실패가 된다.
어느 쪽이든 공통된 통찰이 있다. 왕이 여자 하나 때문에 슬퍼했다는 이야기의 표면 아래에, 당시 고구려가 감당하던 통합의 과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때 고구려는】 유리왕대의 고구려는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시조 주몽이 졸본에서 나라를 연 지 20년 남짓, 왕실은 여러 부족을 아우르고 중국계 이주민까지 흡수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왕의 혼인이 곧 세력 규합의 수단이던 시대다.
화희를 골천 사람의 딸로, 치희를 한나라 사람의 딸로 적은 기록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왕은 토착 세력과 이주 세력 양쪽에서 아내를 맞았고, 두 궁을 따로 지어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며, 결국 실패했다. 화희가 치희에게 던진 "한가의 비첩"이라는 말은 개인의 모욕이면서 동시에 이주민을 향한 토착 세력의 시선이기도 하다.
유리왕은 이후 기원전 9년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고, 서기 3년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國內) 지역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전한다. 다만 유리왕대의 국내 천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기록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12년에는 왕망(王莽)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 군사의 출동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신(新)나라를 공격했고,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낮춰 불렀다.
덧붙이자면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에도 논쟁이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동명왕의 성은 고씨(高氏)인데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이고, 6대 태조왕 이후 다시 고씨가 된다. 이를 근거로 두 사람을 부자관계가 아닌 별개의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황조가」를 부른 왕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이렇게 고구려 초기사 전체의 불확실성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