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파유지연맹 — 친일 네트워크의 단면도, 그리고 주먹

1924 3월 25일 · 경성 남산정 경성호텔

1924년 3월 25일, 경성 남산정의 경성호텔에서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이 출범했다. 이름 그대로 "각파"의 연합 — 국민협회, 대정친목회, 동민회, 노동상애회, 유민회, 동광회, 교풍회, 유도진흥회, 조선소작인상조회, 조선경제회, 청림교까지 11개 친일단체가 한 자리에 모였다. 총독부 경무국이 그간 양성해 온 단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강령은 "관민일치·시정개선, 대동단결·사상선도, 노자협조·생활안정" — 풀어 말하면, 관에 협력하고, 반일 사상을 누르고, 노동쟁의를 막겠다는 선언이다. 3·1운동 이후 급성장한 독립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연맹의 실체를 강령보다 정확하게 보여준 것은 출범 일주일 뒤의 사건이다. 동아일보가 사설로 연맹의 어용성을 비판하자, 4월 2일 밤 연맹 측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 식도원으로 불러냈고, 회유가 통하지 않자 박춘금 등이 폭행과 협박을 가했다. 언론 비판에 주먹으로 답한 것이다.

박춘금은 이 시기 친일의 세 번째 도구 — 폭력 — 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 단체 상구회를 만들어 1921년 상애회(相愛會)로 키운 그는, "상애·공존공영"의 간판 아래 재일 조선인 노동자를 폭력으로 통제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직후에는 노동봉사대 300명을 꾸려 시신 처리와 조선인 색출에 협력하며 일제의 신임을 얻었고, 1924년에는 서울에 노동상애회 지부를 만들고 전남 하의도 소작쟁의 농민들을 습격했다. 그는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다 — 폭력이 출세의 사다리가 된 것이다.

청원(국민협회), 연구(대정친목회), 그리고 주먹(상애회). 1924년의 이 연맹은 그 세 도구가 하나의 네트워크였음을 보여주는 단면도다. 협력의 얼굴이 이토록 여럿일 때 — 가장 경계해야 할 얼굴은 요구하는 쪽일까, 연구하는 쪽일까, 때리는 쪽일까?

출처

이 글은 협력의 계보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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